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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시나리오

: 불쌍한 우리 아기, 대전 일기

[ EPU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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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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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년 08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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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73.62MB ?
ISBN13 97911988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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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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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을 해본 적 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가 교실 가득한 학생들에게 시나리오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이 교실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학생들 역시 무슨 이유에선가 시나리오를 꼭 써야 한다. 그래야 병든 어머니가 낫는다든지, 망하던 가게가 다시 일어선다든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는 동생이 풀려난다든지...... 다들 갖가지 절박한 이유로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데, 그중에 딱 한 가지 이유는 없다. 시나리오를 잘 써서 작가로 입봉하고 성공하는 것.
--- p.9

깨끗하게 비워진 머리를 가지고 학교에 돌아왔다. 왠지 부끄러움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때 꿈을 꾸었다. 나는 시내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어떤 아기를 안고 있었다. 어둡고 쭈글쭈글한 피부를 가진 못생긴 아기였지만 내 아기였다. 그 아기를 목욕탕 수건에 대충 감싸 좌석에 앉아 있으니...... 놀랍게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꿈을 꾸고 나니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시나리오를 쓰자. 못생기고 쭈글쭈글해도 좋으니 내 아기라고 할 만한 것.
--- p.14

어머니에게 나를 낳을 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는 아주 좋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 없고,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고,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아 죽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고 했다. 나는 조그맣고 쪼글쪼글하고 아주 약한 아기였다고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선 언제나 눈물이 글썽인다.
--- p.25

아기목소리(소리): (은희가 억지로 아기 목소리를 내는 듯한 소리) 엄마, 이 사람 맘에 들지 않아. 이 사람을 가까이하지 마세요. 이 사람을 좋아하면 안 돼. 나만 생각하세요, 엄마. (36)

9 은희의 방, 밤

은희는 반지하 자취방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빛이 긴 도형을 만들었다가 문을 닫을 때 사라진다. 은희는 불도 켜지고 방구석으로 천천히 기어간다. 멍하니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벽에 만들어내는 빛 상자를 바라본다. 밤늦게 들어가는 사람의 바쁜 발 모양, 슬쩍 스쳐가는 고양이, 멀리서부터 오는 헤드라이트 불빛. 은희는 눈이 부셔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뜬다. 마이크를 던지고 넥타이를 슬슬 푸는 과장님의 화난 모습이 떠오른다. 헤드라이트의 가장 밝은 부분이 지나간다.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다. 힘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내려가는 지석 씨가 보인다. 은희는 체머리를 흔들고는 벌떡 일어나 이부자리를 펴고 눕는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은희는 돌아누워 눈을 꼭 감고 못 들은 척한다.
--- p.38

은희는 남은 울음을 삼키려고 노력하며 책상 옆의 커피 메이커에서 원두커피를 뽑아 컵에 따르고, 그 안에 커피 믹스 두 개를 한꺼번에 넣어 부장님 탁자로 가져간다. 부장님은 맛있다는 듯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맛을 쩝쩝 다신다.
--- p.41

은희: 그러니까, 음...... 겉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우리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
알 수 없는 말들을 알아듣기 위해 지석 씨는 인상을 점점 찌푸리며 은희 쪽으로 다가가고, 은희는 말을 멈추고 다시 햄버거를 먹던 자세로 돌아간다.
--- p.83

41 거리, 저녁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이는 거리. 환한 표정의 사람들. 손에 선물을 들고 둘씩 셋씩 짝지어 즐거이 걸어간다. 다른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황망히 걷고 있던 은희 앞에 산타가 나타난다. 산타는 길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호객을 하고 있다. 지나가려는 은희를 오른쪽, 왼쪽으로 장난스럽게 막아서는 산타. 은희는 거의 울상에 되어 끈질기게 따라붙는 산타를 피해 도망친다.
--- p.115

입체성은 이야기가 높은 곳과 낮은 곳에서 동시에 흐르면서 생긴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가 섞이거나. 이야기의 의미는 많은 경우 이 입체성에서 생겨난다. 나는 오랫동안 순서대로 쓰는 작가였는데 지금은 구조를 70퍼센트 정도 먼저 쓰고, 쓰면서 내가 세운 구조의 일부를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식으로 쓴다.
--- p.169

2 거실, 낮

혜신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읽던 책을 가슴에 펼쳐놓은 채로. 모든 것을 반짝이게 하는 여름 햇볕이 얼마나 환하게 자기를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고, 창밖에서 나뭇잎들이 웃음을 터뜨리듯 흔들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마당에서 그네가 혼자 심심하게 축 늘어져 있는 것도 모르 고. 빛 속에 드러난 혜신의 얼굴, 아무것도 감추지 못하는 잠든 얼굴. 안 보이는 저 멀리서 들리는 규칙적인 공사장 소음 사이로, 처음에는 작게, 점점 크게, 혜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혜신아, 혜신아......."
--- p.174

여자아이 1, 2(소리): 김정훈!
문을 여는 혜신. 문 밖에는 정훈의 또래지만 키가 훨씬 큰 여자아이 둘이 깡패같이 버티고 서 있다.
여자아이 1: (약간 놀랐지만 뻔뻔하게) 누구세요?
혜신: 나......? 정훈이 사촌누난데.......
여자아이 1: 들어가도 돼요?
혜신이 "어어......" 하는 사이, 이미 밀고 들어오는 여자아이 둘.
--- p.209

34 동양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 안, 저녁

광활하고 풍성한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 안. 입구에서 카트를 끌고 가기 시작하는 네 사람. 혜신이 카트를 끌고 아이들이 뒤를 따른다.
혜신: 자, 오늘부터는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거만큼은 신나게 먹는 거야. 그, 그, 뭐냐, 미역국! 그거 한 솥만 다 먹고 나면, 건강에 좋고, 살도 안 찌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음식과는 이제 안녕이야. 우리는 좀 더 근사한 음식, 음식다운 음식, 먹으면 곧바로 살로 가는 고칼로리에,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벌컥벌컥 마시게 하는, 그런 강력한 음식을 먹을 거야. 비타민이나 칼슘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려. 너네 엄마도 너네 놔두고 즐기러 갔으니까 우리도 그런 것쯤은 먹어도 되겠지, 응? 자, 자, 뭐 먹고 싶어?
--- p.218~219

62 베란다, 낮

무덥고 흐린 날씨. 하늘 저쪽에서는 먹구름이 뭉게뭉게 일고 있다.
혜신(V.O.): 현진이는 그런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다 자기 자신의 일부인걸.
베란다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혜신.
혜신: 확 한번 쏟아졌으면 좋겠다.
--- p.268

선영: 미안하다. 니가 이해해라. 내가 너를 바래다줘야 되는데....... 내가 지금 필름이 끊겼거든. 나는 지금 내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도 몰라.
택시가 와서 선다. 혜신은 선영을 억지로 밀어 넣지만, 선영은 막무가내로 혜신을 꼭 끌어안고 속삭인다.
선영: 오늘 밤은 너만 잊어주면 돼....... 고맙다.
혜신의 볼에 쪽 뽀뽀를 한 선영은 냉큼 택시에 오르더니, 혜신의 손을 물리치고 택시 문을 닫고는 열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혜신은 택시 문을 붙잡고 실랑이하면서,
혜신: 어떻게 혼자 가려구.......
선영은 한 손으로 택시 문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눈을 찡긋한다. 어쩐 일인지 멀쩡해 보이는 선영. 차가 출발한다. 창밖으로 빠이빠이 하는 손.
선영: 그럼...... 내일 수업 시간에 보자.......
"무슨 소리야......." 중얼거리며 혼자 피식 웃는 혜신. 선영이 탄 택시가 사라진 주위에는 지나가는 차들도 거의 없다. 발을 동동거리며 차를 기다리던 혜신은 모퉁이를 돌아 더 큰길로 뛰어나간다.
--- p.291~292

이 책을 만드는 동안 나는 정말 25년 전의 교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때의 친구들. 진실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묻은 조그만 진실이라도 찾아주려고 했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대부분 친구들에게서 배운 것들입니다. 그 친구들, 특히 은영이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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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글을 쓰다 길을 잃었을 때, 정서경 작가의 이야기 속에 잠시 머리를 묻고 방향을 찾곤 했다. 무이한 길잡이인 정서경 작가도 길을 잃어봤다는 것이 크나큰 위안이다. 사랑하는 작가가 자신의 처음을 다시 들여다볼 때 함께할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 정세랑
이 원고는 영원히 비밀일 수도 있었다. 정서경 작가가 첫 시나리오를 쓰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면 끝까지 공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불쌍히 여긴 학생들 중 하나가 바로 나다. 그가 나를 모를 때에도 그로부터 배우고 있었으니까. 정서경이라는 거장의 여러 얼굴을 보며 나는 쓰고 또 쓴다. 그로부터 영향받기를 갈망하면서. 그러나 아무리 닮으려 해도 결코 닮아지지 않는 부분이 나의 진실임을 알아채면서.
- 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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