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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큰글자도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큰글자도서)

큰글자도서라이브러리이동
이주혜 | 창비 | 2024년 09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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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48쪽 | 210*297*30mm
ISBN13 9788936439620
ISBN10 893643962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무지개처럼 다채로워야 할 감정이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 가라앉았다. (…) 어떤 것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모든 것이 자극이었다.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수전에 얽힌 샤워기 호스가 올가미로 보였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고 어둠은 곧 죽음이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어서 잠도 잘 수 없었다. 입을 벌릴 수도 없었다. 음식물은 질식을 떠올리게 했다. 불안이 몸 안의 모든 통로를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갔다.
--- pp.14~15

일기라면 사십대에 들어서면서 쓰기를 그만뒀다. 이십대부터 삼십대에 걸쳐 쓴 수십권의 일기를 마흔살이 된 걸 기념하듯이 사무용 세단기로 죄다 갈아버렸다. 사흘이 걸렸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랄까요. 자신과의 거리가 0일 때 우리는 그것을 문제적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자신과의 거리가 0을 지나 음수에 수렴하는 중이었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외부의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 내면의 동굴로 걸어 들어간 패배자였다.
--- p.15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본 강의 소개 문구였다.
무엇과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도치가 물었다.
내가 기록한 나와. 내가 기록 속에 가두어놓은 나와.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매는 나와.
림자는 신들린 듯 대답을 쏟아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왠지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 pp.22~23

시옷은 집안의 중심이었다. 봄이 오고 새 학년이 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마냥 즐겁고 특별할 줄 알았던 그해 시옷의 집은 요란한 변화를 맞게 된다. 집안에서 한 남자가 사라지고 한 남자가 쳐들어오며 한 남자가 잉태되고 한 여자애가 사내자식으로 둔갑한다.
--- pp.34~35

시옷이 남자애인 줄 아는 어른들은 시옷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거, 사내자식이 낯빛 흰 거 봐라.
그들은 시옷의 하얀 얼굴을,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를, 맑게 울리는 목소리를,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하는 미성을 칭찬했다. 사내자식일 때 시옷은 늘 칭찬을 듣고 매료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사내자식이 되어버린 게 그리 꺼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말 없는 거짓말의 무게만 견디면 되었다.
--- p.71

시옷은 병원에서 태어난 애니와 달리 집 안방에서 태어났다. (…) 시옷의 첫울음이 터진 후 문밖에서 기다리던 남자들의 헛기침이 잦아졌다. 철둑 너머 할머니는 산실을 잘 갈무리하고 나서야 미닫이 방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뭐여?
시옷의 할아버지가 성급하게 물었고, 철둑 너머 할머니는 아무것도 아니고만요.
작게 대답하고 방문을 다시 닫았다고, 언젠가 어른들의 수다를 엿들은 적이 있다. 어른들의 부주의함에 시옷은 단단히 상처를 받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일을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태어난 시옷은 그후로도 여러번 비슷한 문제로 마음을 다쳤다. 상처는 잔잔했고 일상적이었다.
--- p.101

시옷에게 달라진 건 없었다. 시옷은 여전히 맑은 소리로 노래할 수 있었다. 주름치마를 입고 머리핀을 꽂고 입술을 붉게 칠한 것을 변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변신이라기보다 매일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사소한 변화가 아니던가. 그토록 사소한 것들이 커다란 너울이 되어 시옷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수 있다니, 시옷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시옷의 성별을 오해한 건 자신이면서 지휘자 선생님은 왜 마치 시옷이 비겁한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 것처럼 분노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지. 어린 시옷의 머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였다. (…) 시옷은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노래를 뺏겼다. 시옷은 노래를 잃고 잔뜩 잠긴 목으로 억억 울며 걸었다. 5월의 한복판을 울며 걷는 시옷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 pp.210~212

넘어가지 마.
시옷이 내 말을 알아들었나? 꿈속의 시옷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순간 나는 깨닫는다. 시옷은 문턱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알면서도 기어이 저 경계를 넘어가려 한다고.
넘어가지 마.
나는 사정한다. 시옷은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이 말한다. 더는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이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때라고. 저 너머에 어떤 음험한 세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경계를 넘어야 한다고. 세계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통과하는 법이라고. 어린 시옷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다. 손을 뻗어보지만, 시옷은 잡히지 않는다. 시옷은 멀리서 내게 인사하고 문턱을 넘어간다. 그 순간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 pp.224~225

시옷은 교복을 입은 한 소녀의 사진과 마주쳤다. (…) 시옷은 그 소녀가 엄마란 걸 알았고 동시에 엄마란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사진들 속에서 소녀는 불행이라곤 조금도 알지 못하는 얼굴로 천진하게 웃었다. 소녀는 한껏 사랑받고 있었다. 소녀의 미래는 온통 행복으로 도배된 것처럼 보였다. (…) 오직 행복만 누리길 축원받으며 자란 소녀의 미래가 고작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시옷은 두려웠다. 엄마가 자신을 왜 미워하는지 전부 이해한 것 같아서 시옷은 떨었다.
--- pp.234~235

이 은행알을 땅에 심으면 싹을 틔워줄까? 골칫덩이 열매가 무사히 씨앗의 역할을 해낼까? 행여 싹이 튼다고 해도 내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 어떤 미래도 기약하지 못하고 늘 과거로 도망치는 내가?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기다려 기어이 은행의 새싹을 목격한다면 그건 분명 아름다운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속는 셈 치고 양지바른 곳에 심어볼까? 그리고 힘내어 기다려볼까? 어쩐지 마음이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했다.
--- p.298

엄마, 말해봐. 내 나이에는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게 맞지? 이렇게 어설프고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고 실수도 많이 하고 못난 말도 많이 하고 모진 말도 가끔 하고, 이러는 거지? 그렇지? 내 나이 때 엄마는 어땠을까, 어제 처음으로 궁금해졌어. 엄마는 어떤 이십대를 통과해 아빠를 만나고 나를 낳고 지금의 엄마가 되었을까? 어디서 넘어져보고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을까? 일어나긴 했을까? 엄마에게도 지금 나와 같은 시간이 있었을 텐데, 너무나 당연하고 당연한 일인데 나는 왜 그 시간이 한번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 p.320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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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사라지고 한 남자가 쳐들어오며 한 남자가 잉태되고 한 여자아이가 ‘사내자식’으로 둔갑한 그해의 기억. ‘나’는 일기쓰기교실에서 자신의 기억을 ‘시옷’이라는 화자를 앞세워 어렵게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해의 비밀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어느새 시옷의 이야기는 ‘애니’의 이야기, ‘윤심’과 ‘윤수’의 이야기, ‘수호’의 이야기가 된다. 야만과 혐오와 차별을 통과하는,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와 동시에 의심이 싹튼다. 이 ‘일기’는 얼마만큼 사실일까? 작중 인물들이 시옷의 일기를 듣고 ‘소설 같다’고 말하는 순간, 이야기에 불현듯 균열이 발생한다. 이 균열은 이주혜가 소설이라는 장르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보리차가 팔각 컵에 담기면 엽차가 되는 소설의 장면처럼 어떤 이야기는 어떻게 전해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는 송아지 눈망울 같은 진심과 만나게 된다. 소설을 향한 이주혜의 놀라운 진심 말이다.
-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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