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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창비시선-510이동
천양희 | 창비 | 2024년 09월 27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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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152쪽 | 184g | 125*200*10mm
ISBN13 978893642510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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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슬픔은 어깨로 운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은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오래된 슬픔은 향기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을 사야겠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이 택배로 왔다고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나이 먹은 슬픔이
오늘은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하나의 사람과 예순한편의 슬픔」중에서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불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
---「뒤척이다」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지막으로 돈! 천국 외에는 다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신문 배달 소년의 응모 시 한 구절이 아프게 생각난다 어둠은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
---「아침에 생각하다」중에서

여러번 생각하고 한번 말할 때
침묵이 가장 큰 비명이라는 생각이 들 때
작은 돌이 수면에 파문을 일으킬 때
맹세를 물에 적어놓을 때
한계와 경계가 풍향계와 다를 때
몸에 안 좋은 해충이 대충일 때
편견과 선입견이 무서운 견(犬)처럼 느껴질 때
먼 길이라도 갈 때는 가야 할 때
가는 길이 다르고 꿈이 다를 때
누구나 조금씩 우울의 저금통을 가지고 있을 때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라는 게 시일 때
시 쓰다가 날 선 종이에 손을 벨 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가끔씩 울 때
삶이란 학교에서 영원한 학생일 때

그늘이 아름다운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가 필요하다」중에서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목숨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쓰고 또 써도 이 글은
내 의지가 나의 길을 결정한
본래의 나일 것입니다

이제야 할 수 있는 말은
인생아, 고맙다입니다
---「반성문」중에서

바람은 얼굴이 없단다
그래서 다른 모습으로
자기를 보여주지

우는 꽃이란 없단다
그러니 꽃 쪽으로 가서 살거라
꽃은 늘 환한 모습이지

낮에 우는 새는 노래하는 것이고
밤에 노래하는 새는 우는 것이란다
그것이 새들의 모습이지

시를 쓰는 너는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이란다
가끔이라도
사람 마음에 다녀가는 너는
시인 아니냐
---「한 소식」중에서

속에서 불꽃을 피우나 겉으론
한줌 연기를 날리는 굴뚝 같은

세찬 물살에도 굽히지 않고
거슬러 오르는 연어 같은

속을 텅 비우고도 꼿꼿하게
푸른 잎을 피우는 대나무 같은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
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붉은 꽃을 피우고도 질 때는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 같은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
---「시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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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마지막 시 마지막 행까지 읽고 나니 ‘바람’은 어느덧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라는 말은 꼭 바람 같다. 천양희라는 한 사람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날리다 이곳에 낙엽처럼 내린 것만 같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무사하기 위해 시와 한몸이 된 시인은 “철도 없이 제멋대로인”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낸 싸움과 사랑의 기록이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여기까지 왔다. 나는 시인이 바람의 갈피 속에 한장 한장 끼워 넣은 종이들이 풍기는 바람 냄새를 다 맡아본다.
- 황유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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