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권의 담론에서 K-POP에 관해 이야기할 때 “K-POP은 국가 주도로 발전했다.”라든가 “K-POP은 한국 정부의 힘 덕택에 성공했다.”와 같은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K-POP론에는 ‘국책’이라는 말도 흔히 등장한다. 질투심 어린 이런 담론은 숨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변종 중 하나일 뿐, 거의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한마디만 덧붙여 둔다. 국가는 가사를 써주지 않고 곡을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팬들과의 교류에 마음을 쓰지도 않는다. 국가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며 춤도 추지 못한다.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무릇 한국은”, “도대체가 일본은”과 같은 화법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국가’나 ‘민족’과 같은 개념에 매몰되는 환상은 종종 큰 질곡이 되어 작품 그 자체를 응시하는 눈길을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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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을 뒤덮고 있는, 무서우리만큼 구시대적인 호칭 ‘아이돌’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자. 이 책은 K-POP의 스타들을 ‘아이돌’이라는 낡은 관념으로 좁은 테두리 안에 묶어 놓는 ‘올드 아이돌론’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리고 있는 사람들도 ‘아이돌’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감수하며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부르세요.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라고 말하듯, 굳이 정면에서 반론하지 않았다. 예컨대 BTS는 아예 〈IDOL〉을 제목으로 내세우며 작품으로 승화시켜(→392쪽) 올드 아이돌론자의 사상과 감정을 거꾸로 이용하면서 우리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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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을 아티스트라는 개인이 가지는 절대적인 속성이나 된 것처럼 ‘비주얼’이라는 단어로 절대화, 고정화시켜서 떠받든다. 심지어 외모에 경제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미’라는 인식의 본질에 관여하는 ‘변화’라는 동인(動因)을 배제한다. 게다가 그 ‘아름다움’을 아티스트=사람에게서 물건처럼 분리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얼굴을 벗겨서 그 벗긴 가죽을 ‘비주얼’이라는 상품명으로 팔고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자본주의적인 상품화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비주얼 담당’이라는 말 속에 담긴 것은 그런 사상과 감성이다. 맙소사! 원래 ‘비주얼’은 ‘시각적인’ 것, 즉 빛의 형태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MV에서 진정으로 ‘비주얼’을 말하고 싶으면, 아티스트의 외모뿐 아니라 아티스트 뒤의 공간까지 포함한 화면의 구석구석에 이르는, 모든 시각적인 요소까지 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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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작품이라는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그 세계관으로 작품을 만든다. 작품이 세계관이나 사상을 갖는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작품에서 우리가 세계관이나 사상을 ‘읽는=조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세계관이 아니다. 세계관을 지니는 주체도 아니다. 주체는 언제나 우리다. 그렇다면 작품은 세계관이 아니고 무엇일까? 여기에 딱 걸맞은 용어가 있다. 바로 ‘세계상’이다. 역시 독일어로 Weltbild[?v?ltb?lt [벨트빌트]. ‘세계의 그림’ ‘세계의 상像’ 정도의 뜻을 가지는 말이다. 바로 사람들이 별개의 세계상을 작품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내는 것이다. K-POP MV는 작품마다 새로운 ‘세계상’을 조형한다. 그러한 수많은 세계상이 K-POP이라는 눈부신 우주를 구성해 나간다. K-POP의 우주는 지금 엄청나게 확대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미학의 근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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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 데뷔한 6인조 여성 그룹 IVE의 2022년 작품으로 첫 시작 부분의 “예”라는 감탄사 직전에도 이미 작은 성문 폐쇄가 숨어있다. 유진의 “니가 참 궁금해”라는시작 부분의 ‘니’나, “이거면 충분해”의 첫 부분 ‘이’ 등이 전형적인 성문 폐쇄이다. 한국어에서는 일반적인 발화는 물론 노래에서도 이런 곳에 성문 폐쇄를 넣을 필요는 전혀 없다. 분명히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세계 각지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곡을 듣고 ‘니’나 ‘이’ 앞에 놓여 있는 이 묘한 긴장감에 의아해했을 것이다. “뭐지? ‘니’도 ‘이’도 아닌 그 앞에 있는 이 묘한 스타카토staccato 같은 소리는?” 그러고 나서 그 가창법의 멋을 새삼 알아차렸을 것이다. 보컬트레이너 같으면 “엣지edge 있는 소리”라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 p.235
소리의 시간적 특성에도 주목하자. 이러한 성문 폐쇄는 극히 짧은, 어쩌면 공백이라고 할 수 없는 공백을 만들어 낸다. 물론 공백이 아니다. 한국어 음소로서의 자음은 아니지만, 한국어의 언어음에 원래 있는 ‘성문 폐쇄’라는 성질만을 교묘하게 뽑아내어 어떤 ‘형태’로 굳힌, 명백한 ‘목소리’인 것이다. 예를 들어 8분음표의 머리에 마치 싱커페이션syncopation 즉 당김음처럼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매우 예리하게 놓여 있다. 성문 폐쇄는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목소리’로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음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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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무의 2020년 작품 〈AYA〉의 가사 중 “눈물인지 또 빗물인지”에서는 언어음을 활용한 수사법의 재미를 드디어 즐길 수 있다. 한국어의 “뚝뚝뚝뚝”과 영어 중에서 오노마토페 어원인 “drop drop drop drop drop drop”을 반복하는 가사도 절묘하다. 둘 다 한 음절어라는 점에 주목하자. 한국어 발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마지막의 /-p/는 양 입술을 날카롭게 닫고 닫을 뿐, 양 입술을 떼지 않는, 즉 파열하지 않는=열지 않는 입술음이다. ‘drop’은 일본어 외래어에서는 [도-로-ㅂ-푸] 정도의 4박이 되어 이 날카로운 단음절성이 없어진다.
--- p.275
〈Egotistic: 너나 해〉나 〈Forever: 약속〉처럼 위에 든 이런 제목 들은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하나의 언어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새로운 의미의 조형을 도모하고 있다. 이제 Google 번역이든 DeepL이든 chatGPT든 한글을 ‘복붙Copy and Paste’하면 누구든지 대략의 의미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굳이 번역을 하여 새로운 의미 조형을 도모할 기회를 놓칠 이유는 없어진다. 그리하여 〈Promise: 약속〉과 같은 직역적인 조합을 떠나 〈Forever: 약속〉과 같이 두 언어 사이에 일부러 거리를 둔 조합 형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어느 한쪽 항목이 종속적으로 곁들인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언어는 대등한 비중을 갖게 된다. 이 점을 우선 확실하게 기억해 두었으면 한다. 이러한 원리가 가사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 p.309
에스파가 2024년 발표한 〈Supernova〉는 자동차 위로 사람이 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다음 장면에선 카리나가 차 위에 누워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던지고 있다. 아티스트 각각을 초인적인 여성으로 그려낸 MV이다. 신체성을 극대화하면 이렇게 된다는 듯. 이러한 콘셉트는 아바타를 등장시키는 디지털 환상 노선보다 훨씬 호감이 간다. 윈터가 한 손으로 송출탑을 잡고 웃으면서 빙글빙글 도는 장면 등에서 보이는 카메라도 편집도 일급이다. 제목 속 ‘nova’(새롭다)라는 말 못지않게 의상도 영상도 무척 신선하다.
--- p.354
〈붐바야(BOOMBAYAH)〉 속 제니의 랩 파트를 들어 보자. 0:38, “니가 말로만 듣던 걔가 나야 Jennie”라고 제니 자신이 말한다. 생각해 보자. 여기서 제니는 MV 내부에서 랩의 언어로 만들어지는 이야기 속에 있다. 제니가 있는 그 층위에서 이야기의 외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제니의 층위로, 즉 한 차원 높은 계층으로 빠져 나와 있는 것이다. (…) 이때의 제니는 랩의 이야기 속에서 조형되는 픽션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이미 아티스트로서의 제니이다. 여기서는 아티스트가 작품 안에서 아티스트 자신에게 언급하는 ‘자기언급self-reference’이라는 성격이 보인다.
--- p.334
K-POP 관련 동영상에는 여러 언어권에서 팬들이 번역을 붙인다든지 사이트에 번역을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에서도 일본어로 번역이 시도된 많은 동영상이 인터넷상에 올라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번역에 대해 저작권자들이 저작권 침해의 문제를 엄격하게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K-POP 자본은 그런 비공식적인 번역이나 인용을 아주 너그럽게 용인해 온 것이다. 적은 금액이라도 저작권료를 회수하기 위한 절차에는 그만큼의 비용이 발생한다. 그러니 저작권을 주장하기보다 이렇게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주는 사람들의 활동이야말로 K-POP을 실질적, 경제적으로 크게 뒷받침해 준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357
오늘날 K-POP MV의 한 가지 경향으로 곡의 단조로움과 진행의 예정조화를 영상으로 보완하려는 사고방식을 지적할 수 있다. 단조로운 도입부를 자극적인 영상으로 커버한다. 이제 그런 방식은 그만두자. 우선 곡 자체의 단조로움을 폐기하고 예정조화로 가득찬 구성부터 새로 다시 만들자. 팬들 앞에 서는 날을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온 아티스트에게 너무 큰 실례가 아닌가. 선율을 듣고 나서 그다음에는 이렇게 진행되겠지, 하는 식의 청중의 예상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상은 ‘항상’ 뒤집어져야 한다. 예상과 어긋나는 만남, 거기서 오는 자극과 쾌감. 그것이 K아트다.
--- p.365
〈붐바야(BOOMBAYA)〉 0:39에는 아티스트의 ‘자기언급성’을 뚜렷하게 제시해 주는 상징적인 구절이 있었다. “니가 말로만 듣던 걔가 나야 Jennie” 바로 제니가 직접 랩으로 “Jennie”라고 말한 순간이다. ‘자기언급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불과 1~2초라는 짧은 시간에 이만큼이나 선명하게, 그리고 자극적으로 각인해 주는 작품이 또 어디 있었을까? 작품 내부의 이야기 층위에서 ‘제니’라는 고유명사로 실존하는 아티스트의 삶의 층위로 메타화해서 벗어나 버린다.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니가 말로만 듣던’이라는 말로 ‘니’ 즉 K아트를 접하고 있는 우리를 〈BOOMBAYAH〉라는 K아트의 세계상 내부로 어느 틈엔가 끌어들이는 것이다.
--- p.503
K아트로서 완성된 K-POP은 가까운 시기에 붕괴될 것인가? 만약 붕괴되는 사태가 있다면 다음 세 가지다: (1) LAVnet, 특히 YouTube가 붕괴할 때 (2) ‘K아트’가 ‘아트’가 될 때 (3) K아트가 작품으로서 힘을 잃을 때.
--- p.509
경제적인 성공과 함께 ‘K아트’가 묽게 희석되어 그냥 ‘아트’가 되어 가는 ‘붕괴’의 두 번째 시나리오가 서서히 진행 중이다. 이 상황을 좋게 볼 것인지, 안 좋게 볼 것인지는 팬덤 이전에 먼저 한국의 음악 자본이 어느 쪽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음악 자본이 “이제 더 이상 ‘K아트’일 필요는 없다. ‘아트’면 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자본의 힘을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아티스트들 스스로가 그러한 흐름에 쉽게 저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 개개인이 자본을 쉽게 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p.523
아티스트에게도 중요한 부탁을 하나 하고 싶다. 아티스트를 지망하는 분들에게 이 책이 보내는 조그마한 성원과 격려이기도 하다. 노래를 부를 때, 제발 눈을 감지 말아 주기를! 단언컨대 눈을 감으면 사람은 모두 똑같은 얼굴이 된다. 그렇다, 마치 데드마스크death mask처럼.
--- p.553
그룹의 인원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아티스트와 팬들의 부담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네 명이라면, 다섯 명이었다면 각자가 두드러지게 존재감을 보여 주는 훌륭한 그룹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멤버 속에 묻혀 존재감을 발휘하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희미해지고 만다. ‘칼군무’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한 명이지만, MV를 전체적으로 보면 그 한 명의 존재감은 매우 희미하다. 멤버 각자의 희박함을 만회하고 그룹을 지탱하기 위해서 는 MV 밖에서 아티스트 개개인이 애쓰며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한다. 혹은 팬들의 경제적이거나 정신적인 헌신과 노력이 필요해진다.
--- p.562
뉴진스 다섯 명의 불과 1초 남짓한 ‘ETA 행진’을, 2-1에서 본 ITZY의 명작 〈Voltage〉와 비교해 보자. 아주 낮은 위치에서 광각 렌즈로 찍은 다섯 명의 ‘Voltage 행진’은 MV 2:38부터 등장한다. 안무나 몸의 자세, 의상, 아티스트들의 시선, 그리고 카메라의 포지션과 움직임, 찍히는 아티스트와 찍는 아티스트 등등, 작품 속 사상까지 나타나서 서로 다른 성격의 흥미로운 대조를 찾아볼 수 있다. ‘ETA 행진’을 하는 땅바닥에 색종이를 깔아 놓은 섬세한 연출도 인상적이다. 힘차고 확고한 자기 생각을 갖고 중량감 있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시간 속에 새겨 넣는 ‘Voltage 행진’과, 찰나적 인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기록해 두려고 순식간에 흐르듯이 움직이는 ‘ETA 행진’.
--- p.567
일장기만이 아니다. 이른바 ‘제국’의 상징인 대영제국의 유니언잭, 미국의 성조기, 프랑스의 삼색기 등도 마찬가지다. 일장기등 ‘제국’의 국기는 침략과 억압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에게 트라우마까지 유발하는 트라우마타이저traumatizer이다. 이런 도상을 K-POP MV에서 아티스트들이 패션으로 부분적으로나마 활용했다면…. 끔찍한 일이다. 우리의 일상 패션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고, YouTube에서도 국기가 사용된 안이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한국어’나 ‘일본어’와 같은 ‘언어’의 표상으로서 국기를 사용하는 것도 적지 않다. 국가와 민족과 언어는 일치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원리이다.
--- p.595
K-POP도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늙는다’. 소중한 어떤 것도 언젠가는 미세하게 부서져 내리는 법. 그런 부서짐을 초래하는 것을 우리는 ‘늙음’이라는 단어로 불러 왔다. 그렇다, 누구나 알면서도 결코 입에 담기 싫어하는 저주의 말이다. 극한을 노래하고, 한계까지 춤을 추는 K-POP. 저 너머로 ‘늙음’을 바라보며, 혹은 ‘죽음’까지 바라보며 노래하고 춤추는 K-POP. 그것은 오직 ‘지금·이곳’의 희열, ‘지금·이곳’에 대한 애절함과 안타까움이다. 사람의 삶에 있어서 이보다 더 짧은 시간이 있을까?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가 무엇이든, 작품은 격렬한 속도로 지나가는 ‘지금·이곳’의 희열, ‘지금·이곳’에 대한 애절함을 항상 내포한다. 그렇기에 K-POP은 지구상의 사람들의 가슴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 p.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