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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달이 뜨는 밤, 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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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298g | 128*188*17mm
ISBN13 9791197993466
ISBN10 1197993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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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죽지 않았다. 의자를 걷어찼으니 죽어야 했다. 올가미를 잘못 맨 걸까?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에 걸린 로프를 찾았다. 나뭇가지도, 로프도 제대로 걸려 있었다. 그녀 혼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만 달라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죽어볼 셈이었다. 의자에 올라가 목만 매달면 끝이다. 그런데 의자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밤하늘의 은달은 그대로였지만 아까까지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스산하기 짝이 없던 은달이 이제는 세상을 감싸는 따듯한 빛을 뿜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은달에 꼬리가 달려 있었다.
--- p.15

“우리는 이쪽으로 갈 거예요.”
기분 탓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가리키는 방향에 은빛으로 발하는 뭔가가 있었다.
“저쪽에 길이 있을까요?”
“나만 믿어요. 길이 있어요.”
“죄송하지만 아는 길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가끔 새로운 길을 찾는 것도 좋아요.”
할머니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할머니의 손을 맞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은달 카페의 공기처럼 따듯했다. 그녀의 불안감이 훨씬 나아졌다.
--- p.33

“어때, 심장이 안 뛰지?”
사실이었다. 소년의 심장은 고요했다.
“처음엔 나도 놀랐어. 하지만 이젠 이게 나은 것 같기도 해.”
소년은 이 상황이 낫다는 누나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간이 좀 더 멈춰 있는 편이 나은 건 확실했다. 그래야 더는 아무도 죽지 않을 테니까.
--- p.128

그간 그녀는 수없이 다양한 죽음의 방식을 상상해왔다. 그중에 추락사는 없었다. 그것도 하늘에 두둥실 뜬 집 위, 철새 떼에 부딪치는 바람에 떨어져 죽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녀가 갖은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은달 카페는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쾅 하고 둔탁한 느낌이 왔다. 은달 카페가 뭔가에 부딪친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은달 카페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 충돌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사과나무예요! 사과나무에 걸렸어요! 우린 살았다고요!”
--- p.185

사과꽃파이는 지금껏 그녀가 구웠던 그 어떤 빵보다도 우아하게 은달 카페를 띄웠다. 은달 카페는 구름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은달 카페가 구름 아래서 천천히 움직이는 만큼 이동하는 시간대도 현재와 별 차이가 없길 바랐다.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진 듯했다. 은달 카페가 땅에 착륙했을 때, 바깥 풍경이 낯익었다. 고개를 돌리니 동아일보 사옥이 보였다. 저 멀리 광화문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은 한복과 양복을 적당한 수준으로 섞어 입고 있었다.
--- p.213

지금껏 그녀는 여행을 하며 자신이 구운 빵만 먹어왔다. 베이킹은 어디까지나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좀 더 멀리 보자면 죽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남이 굽는 빵을 먹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늘 남을 위해서 빵을 구웠다. 생초콜릿은 할머니를 위해, 소금빵은 차월우를 위해, 모닝빵은 소년을 위해, 팬케이크는 닐 암스트롱을 위해, 사과꽃파이는 백설을 위해…… 그리고 지금 이 단팥빵은 구보를 위해 굽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빵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는 스스로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행복해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행복이 사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 모든 걸포기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그랬다.
--- p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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