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멸망한 이유 ? 이처럼 진골귀족이 전국의 땅을 분점하고 자신의 사적인 인맥으로 지배하면서 진골의 수가 증가하고 분파들의 세력도 확대 되었다. 이에 진골귀족 간에 세력다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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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독재정권이 군사력은 강하게 한다는 생각은 의외로 널리 퍼져있는 속설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오해다. 반대로 전제적, 독재적, 혹은 경직된 사회일수록 전쟁을 수행하는 데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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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등의 협력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궁을 점거했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거사했다고 하자 백성들이 호응하여 자진해서 궁성에 몰려든 사람이 만여 명이 넘었다고 했다. 이 기사는 그대로 믿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곤란한 기록이다. 민심을 얻어 즉위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성공한 반정은 늘 이런 식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없으란 법도 없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날 왕궁 앞에서 환호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철원의 높은 물가와 식량부족, 부족한 물자로 고통받던 백성들과 상경한 관리와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예가 체포되지 않고 도주에 성공한 것으로 보면, 기록처럼 궁예를 위해 싸운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같다. 어쨌든 왕건은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궁예는 변장을 하고 산 속으로 도망했다.
그는 산을 타고 평강 그러니까 서북쪽으로 달아났다. 방향으로 보아 황해도 북부나 평안도 지역을 목표로 했던 것 같다. 지방에는 아직 궁예를 추종하는 부하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로 달아나 자신의 왕국을 탈환하거나 아니면 여생이라도 보존하려고 했을 것이다.
궁예를 놓쳤다는 보고를 받은 왕건은 아찔했을 것이다. 궁예는 젊은 시절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 산 속의 생활과 도주라면 누구보다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도 이번에는 산 속에서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그가 죽주에서 기훤의 무리에 가입한 때가 벌써 28년 전, 왕 노릇을 시작한지도 근 20년이 되었다. 그의 나이는 50대쯤이었겠지만 젊은 시절의 야성과 체력은 고갈되어 있었다.
이틀을 산에서 보낸 그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산에서 내려와 보리 이삭을 끊어 먹다가 평강에서 사람들에게 들켜 살해되었다. 그의 무덤은 조선후기 까지도 평강 국사봉 아래에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자취나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왕전을 옹립한 장군들은 모두가 마군 지휘관이었다. 마군 중의 한 부대가 쿠데타의 주역이 된 것이다. 당시 태봉군의 군사편제는 알 수가 없지만, 나중의 경우를 보면 궁예군은 크게 마군과 보군으로 구성되었는데, 규모는 서로 반반이었다. 마군이 순수한 기병부대였는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특수한 부대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홍유 등이 전체 마군을 통솔하는 사령부의 지휘관이었는지 마군 중에서 한 부대의 장수였는지도 정확하지 않다.그러나 보군보다는 마군이 전력도 세고 격도 높았던 것 같다. 그 지휘부 혹은 몇 개의 마군 부대가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과 왕건의 관계도 불확실하다. 그들은 대개가 일반 병사에서부터 출발하여 궁예군의 장수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출신 배경으로 보면 궁예와 훨씬 가까웠을 인물들인데, 그들이 궁예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쩌면 궁예가 자행한 일련의 숙청작업에서 그들의 세력이 밀려나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들과 왕건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왕건과 틀별한 관계를 가진 인물들이었다면 언급이 없을 리 없다. 이것은 왕건이 태봉에서 최고의 장수이기는 해도 궁예군 전체에서는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궁예가 왕건을 경계하면서도 그에게 방심했던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건은 무혈쿠데타를 성공시켰고, 이후에도 모든 사람을 덕으로 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실체는 너무 미화되었다. 실제로는 궁예의 부하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단행되어싸. 그들은 오랫동안 궁예와 함께 강원도 산간지역을 누비던 동료들이다. 의리와 충성이 남달랐을 집단이다. 그 중에는 궁예와 같은 승려 출신도 있고, '도끼'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깡패, 전과자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대개 궁예가 젊어서부터 거느리던 사람들로 거의가 군지휘관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거느린 무사와 병력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궁예세력의 숙청은 고려의 군사력에 큰 타격이었고, 어떤 이는 후백제로 투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후유증은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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