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종교가 일제하에서 민족 정신의 사회적 전개를 기도했다면, 일제는 민족종교를 말살하려고 기도했다. 양자는 첨예한 대립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정책적 의도에 의하여 설정된 개념의 범주 안에서 아직도 우리 사회가 민족종교를 이해하고 있다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 하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일제의 식민 정책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p.18
2. 민족종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일차적으로는,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에서 비롯된다. 일본 총독부는 처음부터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등 사회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한국 자생 민족종교들을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을 종교와 유사한 단체라는 뜻에서 유사종교, 또는 종교를 닮았으나 종교가 아니라는 뜻에서 사이비종교라 규정했다. 이처럼 민족종교는 처음부터 존재를 거부당했던 것이다.---p.21
3. 일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대체로 다섯 가지의 탄압 정책을 써서 한국 민족종교를 탄압했다. ① 괴뢰단체를 통한 분열 정책, ② 이념적 내부 분열 정책, ③ 민족감정의 이반을 통한 고립 정책, ④ 반사회단체로의 매도 정책, ⑤ 무력적인 제압 정책. 이러한 다섯 가지 방법을 효과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모든 민족종교 단체들이 오래지 않아 사회적인 공신력을 잃도록 조작했다.---p.23
4. 한국 민족종교들은 일제의 다양한 탄압 정책에 의하여 그때그때마다 효과적으로 통제되고 조정되었으며, 급기야는 위축되었다. 대부분의 민족종교들은 비밀 집해를 하는 비밀 조직으로 지하화되었기 때문에 일본 총독으로서도 완전히 뿌리를 뽑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활동을 하던 종교들은 예외 없이 내부 분열이 일어나도록 원격 조종되어 오래지 않아 탈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비밀 집회 전통을 가진 종교들과, 사회 활동을 하던 종교들은 각각 후에 심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p.86
5. 천도교와 같이 잘 짜여진 조직과 훈련된 인력으로 구성된 종교들은 일제가 이른바 혁신 세력을 통하여 종교단체에서 민중교화와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종교단체들로 하여금 영성적 권위를 잃고, 사회문화운동 단체의 성격을 띠게 했다. 그 결과 천도교 사상의 교리적 성격을 잃고 마치 계몽철학과 같은 모습을 갖게 했다. ---p.87
6. 예컨대, 일제는 보천교와 손을 잡고 결성한 시국대동단 활동을 보호 격려하면서 보천교의 친일을 유도함으로써 보천교를 민중으로부터 괴리시켰던 것이다. 민중과 언론이 보천교로부터 등을 돌린 상태이기 때문에 일제는 사회적인 반발을 전혀 사지 않고 보천교의 조직을 와해시키고 손쉽게 재정을 환수할 수 있었다. 보천교의 교세가 폭발적으로 커가고 이에 따라 엄청난 양의 재정이 보천교에 모이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민중의 인심과 여론이 보천교를 이반하는 계기를 놓치지 않고 그 재정을 갈취하고 조직을 와해시켰던 것이다. 보천교는 일제의 조직적인 유도에 일방적으로 끌려갔다.---p.104
7. 대종교는 동학혁명 이후 항일 민족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대표적인 종교였다. 이러한 대종교는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초기에 만주로 이전하여 힘겨운 대일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친일 조직을 이용하여 민족운동 역량을 약화시키기도 하였고, 중국인을 이용하여 만주 한인을 통제하기도 하였으며, 경신년대토벌(1920)과 같은 직접적인 탄압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중국 세력의 외교적 이용이나, 친일 전위단체의 이용, 그리고 단기적인 파병에 의한 통제 정책 등과 같은 간접적 통제 정책은 1930년대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가혹한 직접 무력 통제였다.---p.110
8. 일제 총독부 당국은 한말 이래 발흥한 수많은 종교를 ‘기성종교가 민심의 구제에 무력할 때 기성종교를 종합하여 종교적 사명을 부흥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유사종교라 명명하였다. 천도교 역시 동학 계열의 유사종교와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 학무국 종교과가 아닌 경무국警務局의 관리와 단속 대상이 되었다. 특히 교도 300만을 일컫는 천도교의 존재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있어서 가장 비중 있는 사회 세력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천도교의 미세한 동향조차도 일제 당국에 의해 철저히 파악되고 있었다.---p.145
9. 1933년에 보천교에 대한 일경의 주된 탄압 이유는 ‘사이비종교’의 혹세무민이었다. 정읍경찰서에서 주로 담당을 하였다. 이때 보천교를 해체하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고, 이어 ‘벽곡壁穀’으로 굶어죽는 자도 나왔다. 1933년 이후 이들은 각기 뿔뿔이 흩어져서 소규모 비밀 회합을 해 오다가 그 가운데 일부는 반국가 단체로 몰려 전멸당하였다. 수순대로 보천교 조직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사건만을 색출, 결정적인 단서로 발본색원하기 시작한 때는 1929년 경부터였다.---p.313
10. 대종교는 1915년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에 의거하여 종교 활동을 인정받으려 하였지만 종교로 인정되지 않았다.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 등과 같은 공인종교 이외의 유사종교는 총독의 재량에 의해 종교적 활동이 허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총독에 의해 허가되지 않은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15년 12월 21일 나철은 「포교규칙」에 준하는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총독부에서는 대종교가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접수를 기각하였다.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로는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독립 결사체로 인정하여 치안 경계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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