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백 명을 상대할 자가 누구인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군인 백 명을 상대합니까.”
작지만 야무지던 석순 언니가 따지고 들자, 중대장이 병사들을 시켜 석순 언니를 앞으로 끌어냈다.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군인들은 닭 껍질을 벗기듯 석순 언니의 몸에서 옷을 벗겼다. 석순 언니의 몸은 깡말라 사내아이의 몸 같았다. 겁에 질린 소녀들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녀들을 한 명 한 명 씹어먹을 듯 바라보는 중대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얼른 고개를 떨어뜨렸다. 막사 뒤에서 수십 개의 못을 동시에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곧 끔찍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 p.18
위안소에 있을 때 그녀는 몸뚱이가 하나인 것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하나인 몸뚱이를 두고 스무 명이, 서른 명이 진딧물처럼 달려들었다.
하나인 그 몸뚱이도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것이 아니던 몸뚱이를 부려 그녀는 이제껏 살아왔다. --- p.38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당하고 왔는지 모른다.
어쩌다 보니 남의 집 식모로만 떠돌다 혼기를 놓친 줄로만 안다. 신세를 지는 것도 아닌데, 혼자 사는 그녀를 짐스러워하고 못마땅해하는 여동생들에게조차 그녀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남자라면 몸서리가 나서 싫다고.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펑 쏴버리고 싶도록.
그녀는 누가 시집가라는 소리만 하면 두드려 패고 싶었다. --- p.44-45
군인들이 다녀갈 때마다 그녀는 식칼로 아래를 포 뜨는 것 같았다. 군인이 열 명쯤 다녀가고 나면 포를 하도 떠 아래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래는 무시로 바늘 들어갈 구멍도 없이 훌떡 뒤집어졌다.
소녀들은 자신들 몸에 다녀가는 군인들 명수로 일요일인지 알았다. 그곳에는 달력도 없어서 소녀들은 날짜도, 요일도 몰랐다. 모든 날들은, 모르는 날들이었다. 모르는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소녀들은 폭삭 늙었다. --- p.87
해방이 되고 소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더러는 일본 군인들을 따라가고, 더러는 중국에 남고, 더러는 국경을 넘다가 죽고. 하여간 죽는 게 여사였다.
누구누구가 살아서 돌아왔는지 궁금하면서도, 보고 싶어 죽겠어서 군자의 고향집까지 찾아갔으면서, 그녀는 혹시나 우연히 소녀들을 만날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길을 가다가도 누가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 같으면 얼른 골목으로 숨어버렸다. --- p.99
누렇게 바랜 신문지 쪼가리 한 귀퉁이에는 강인한 인상의 여자 얼굴이 증명사진보다 조금 크게,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녀의 두 눈 초점이 여자의 얼굴에 모아진다. 김학순, 그 여자다. 수십 년 전 티브이 속에서 울던 여자.
김학순…… 그 여자가 어느 날 저녁에 티브이에 나와 막 울었다. 밥을 먹던 그녀도 밥알을 입에 문 채 울었다. 그 여자가 우는 것을 보니까 덩달아 그렇게 눈물이 났다.
그녀는 날짜도 잊히지 않는다. 1991년 8월 14일이었다. 늘 그렇듯 혼자 티브이를 보다가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 p.141
그녀도 따라서 고백하고 싶었다. 나도 피해자요, 하고. 그때마다 그녀는 가제손수건으로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피해자다…… 나도 만주 하얼빈까지 끌려가 그 짓을 당했다…… 열세 살에 끌려가 그 짓을…… 애기였을 때 끌려가…….’
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그 말이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올랐지만 꾹 삼켰다. --- p.145
새삼스레 이 세상에 달랑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녀는 딸이 하나 있었으면 싶다.
부산에서 식모살이를 할 때 그녀를 쫓아다니던 총각이 있었다. 남자라면 몸서리가 쳐졌지만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면 그 남자와 살림이라는 걸 차려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산부인과에서 진찰을 받아보았다. 산부인과에서는 그녀에게 다른 소리는 하지 않고 자궁이 한쪽으로 돌아가서 애를 낳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자신이 만주라는 데를 다녀왔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 그녀는 총각 모르게 부산을 떠나왔다. --- p.174
그녀는 늘 그렇듯 일어나자마자 티브이를 튼다. 다행히 한 명에 대한 소식은 없다. 한 명은 아직 살아 있다. 담요를 개키던 그녀는 깊은 숨을 토한다. 그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든,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든, 그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 모르는 어떤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든, 한 명도 살아 있지 않은 날이 머지 않았다는 걸 깨달아서다. --- p.217
그녀는 한 명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여기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증언이라는 걸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왜 이러나 싶기도 하다. 여태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다가, 이리 숨겨놓고 저리 숨겨놓고 있다가. 이렇게 늙어가지고. 죽을 때가 돼가지고.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