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어떤 특정한 형태의 탈취와 착취가 “박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소유했다가 나중에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소유물이 있는 것일까요? 때로는 그렇기도 하지요. 그런데 대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개개인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인간도 재산의 한 형태일까요? 만일 노예제라는 역사적 조건이라든가 자본주의의 부산물인 소유 개인주의의 형태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소유권이라는 법률적 표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소유권이 없는 곳에 개인도 없다는 적절한 주장을 하고 있는 맥퍼슨은 소유하는 개인의 생산과정에 대한 중요한 계보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저는 우리가 토지 강탈과 영토 박탈에 반대할 때 동시에 자본주의를 이루는 주요한 구조에도 역시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저로 하여금 소유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도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박탈에 반대하는 윤리적이고도 정치적인 방법을 우리가 찾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아포리아로서의 박탈, 혹은 박탈이라는 개념의 곤란함」중에서
말씀하신 “할당된 처분 가능성”이라는 개념에 깊이 공감합니다. 처분 가능성과 불안정성을 할당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을 이 개념은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동등하게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존재론적 범주로서의 불안정성과 어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야기된 불평등과 궁핍함의 상태로서의 불안정성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개념을 특히 중요한 것으로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기한 두 번째 불안정성은 존재론적 상황을 이용해 작동합니다. 이는 불안정성이 상처와 상실에 대한 일종의 취약함으로서 이해되면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저는 불안정 상태(precariousness)라고 부르고자 했습니다. 허나 불안정성을 배분하고 처분 가능성을 할당하는 비균질적 방식들은 분명히 신자유주의적 형태의 사회적·경제적 삶이 목표하는 바이고, 또한 그 효과이기도 합니다.
---「(실체의 형이상학 비판 이후의) 박탈의 논리, 그리고 인간이라는 질료」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수십 년 전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응했던 도전, 그리고 가사 경제, 노동의 재생산, 문맹과 가난의 차별적 양산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그런 도전에 또다시 직면하고 있습니다. “불안정성의 일상화”에의 고려를 포함하는 불안정성이라는 주제에 제가 관심을 가지는 한 가지 이유는, 이것이 사람들을 불안정한 상태에 적응하게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안정성은 목표로 하는 인구 집단을 실업 혹은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극도로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노출시키고, 이로써 가난과 아울러 경제적 미래에 대한 불안전함을 초래하고, 또한 이러한 인구 집단을 완전히 내팽개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들을 소모가 가능한 사람들로서 호명하면서 작동합니다. 불안정성의 일상화의 이와 같은 감응적인 표지들은 불안정 상태를 몸소 느끼는 것을 포함하는데요, 이것은 미래에 대한 손상된 감각, 그리고 질병이나 인간의 유한성과 같은 것들에 대한 극도의 불안함을 포함합니다. 이는 특히 의료보험이 없다든가, 혹은 노동 조건과 극대화된 불안감이 한데 엮여 심신을 피폐화시킬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상태가 어떻게 경제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을 가로지르는지에 대한 단지 한 가지 예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원론과 결정주의 모두를 피할 수 있는 새로운 횡단적 범주와 사고 형태라는 것을 제시해줍니다.
---「“경제 우선주의”에 대한 제동」중에서
저항하는 주체의 생존을 위한 안전한 방법으로서 너무나도 쉽게 칭송되곤 하는, 그리고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인정(에 대한 약속)을 정치의 최종 목표로 바라보고 있는 자유주의적 인정의 관점은 기실 인정의 조건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못합니다. 인정이, 그리고 인정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동화가 곧 주체의 자기-결정적 삶으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그것들이 혹은 그저 규제적 권력이 제공한 자기-규정의 기반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한 주체의 생존으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주체의 위치를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 민족성과 계급으로 각각 다르게 지정하는 정치적 기표들은 어떻게 미래에 재전유될 수 있는 불확정성(contingency)과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와 같은 질문들을 하는 것이 곧 우리가 인정과 그 인정이 필수적으로 전제로 하고 있는 규제적 권력을 어떻게 견디어내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열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유주의적 인정이 우리가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인정과 생존, 혹은 인정을 견디어내기」중에서
책임감을 취약하지 않으면서도 무책임한 자기 절제로 서 제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전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와 같은 전유와 반대로 여기서 우리는 반응의 성향은 그것이 갖고 있는 그 모든 불확정성과 경합 가능성 안에서 사회변혁의 정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향-으로서의-박탈(dispossession-as-disposition)은 따라서 반응성과 책임감이라는 사안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위치,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말입니다. 응답하라는, 책임을 떠맡으라는 타자의 부름에 영향받고, 허물어지고, 그것에 얽매이게 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정치 공간이 가능하며 열리게 되는 것인지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성이 차별화된 세계에서, 만일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 외부에”,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타자에 매여 있고 타자에게 무장해제된 채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우리 외부에서 혹은 우리 자신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등장하는 요구들에 사로잡혀 있는 채로 존재한다면, 책임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와 같은 성향으로서의, 노출으로서의, 자기-타자화로서의 박탈이라는 생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임감으로서의 반응성」중에서
우리는 또한 단식투쟁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단식투쟁을 감행하는 이들은 자신의 육체를 정치적 힘의 원천으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식사를 계속하는 수감자는 감옥 운영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고, 따라서 단식하는 수감자는 그 시스템과 감옥 현실의 비인간성을 노출하는 것이고, 언어적 발화의 형태를 취할 수도, 혹은 취하지 않을 수도 있는 육체적 행동을 통해 “아니오”라는 표현을 구성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단식투쟁은 수감자의 죽고자 하는 의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주는데요, 이는 그의 생명이 재생산되는 조건들이 그 생명을 죽음과 불가분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옥에의 예속과 감옥의 통제는 대개 감추어져 있는 형태로 간과되기 일쑤인데 반해 단식투쟁은 또한 인도주의적인 도덕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여론을 환기시킵니다. 단식은 이 경우 일종의 저항의 한 형식입니다. 그리고 인도주의적 스캔들과 같은 기삿거리에 언제나 몰려드는 언론의 도움으로 단식은 공적인 저항의 한 형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의 자살과 방치, 감금 혹은 강요된 고립 등을 통한 공적으로 자행되는 죽음의 거래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삶을 특징짓는 것으로서 “죽음”에 대해 고민해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만, 또한 단식투쟁을 통해서 저항의 의지를 이해하도록 요구받습니다. 방치, 감금, 강요된 고립과 같은 체제 중 한 가지 조건 아래에서 어엿한 한 명의 주체로 구성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따라서 유일한 저항이란 주체 그 자체를 허무는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한 생명으로서의 스스로를 박탈하는 것은 강압적이고도 탈취적인 힘으로부터 그와 같은 형태의 권력을 박탈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행성의 정치적 전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