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지금까지 국악계의 정설(지배학설)로 알려진 ‘아악雅樂’에 대한 관점을 전면적으로 뒤엎는다. 이는 기존의 아악에 대한 ‘패러다임의 교체’를 의미한다. 즉 아악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 필자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이미 560여 년 전 세종대왕이 실천적으로 보여준 내용이기도 하다. 필자는 단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주체적 문화군주인 세종과, 그 뜻을 이어받아 실현한 세조의 ‘불멸의 업적’을 이 시대에 소개할 뿐이다.
세종은 당시 종묘제례 등의 주요 국가의례에 반드시 필요한 음악을, 중국의 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이때의 음악은 물론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뮤직(music)과는 다르다. 당시 왕실의 주요 국가의례에 수반되는 음악은 ‘아악’을 말한다. 즉 세종은 중국 아악이 아니라 ‘한국 아악’으로 국가의례를 거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한문이 있음에도 따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처럼, 당시로서는 참으로 어렵고 무모하기까지 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문화적 자주국이라는 원대한 꿈을 마침내 ‘신악新樂’으로 완성하였고, 이를 그의 아들인 세조가 계승하였다. 즉 기존의 중국 아악이 아니라 새로운 한국 아악으로 국가의례를 거행하였던 것이며, 이 새로운 한국 아악이 곧 ‘신악’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악’의 일부가 바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종묘제례악’이다. 그러니까 ‘종묘제례악’은 세종에 의해 창제되고 세조에 의해 확립된 한국 아악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종묘제례악’은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2001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무형유산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국악계에는 ‘한국 아악’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아니 존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악은 중국에서 유래한 의례 음악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아악=중국의 의례 음악’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음악사에서 아악의 존재는, 고려 예종 때인 1116년 송나라에서 보낸 중국 아악인 ‘대성악大晟樂’을 그 시초로 한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한국 음악사에서 아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악이 유래한 중국의 경우, 기원전 11세기인 주周나라 초기부터 이미 아악은 존재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보다 무려 2,200여 년이나 지나서야 아악이 등장한 것이 된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 문헌(『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이미 신라 유리왕儒理王(24~57) 시절부터 아악이 존재하였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렇게 ‘대담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하나는 아악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명제이다. 이를 토대로 필자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전혀 새로운 주장은 다음 네 가지다. 첫째, ‘아악=중국의 의례악’이 아니라 ‘아악=궁중의 의례악’이다. 둘째, 세종이 말년에 창제한 신악은 향악이 아니라 ‘한국 아악’이다. 셋째, 현행 ‘종묘제례악’은 세종과 세조에 의해 탄생된 한국 아악이다. 넷째, 고려 예종 때 우리나라 최초로 아악이 존재하였다는 한국 국악계의 오랜 통설은, 사대주의적 아악관에서 비롯한 시대착오에 불과하다.
그동안 우리는 세종이 말년에 창제한 신악이 한국 아악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날의 학제가 서구적 학문 체계와 분류 방법에 따라 세분화되고 분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자孔子(기원전 551~479)로부터 비롯한 동아시아의 2,500여년에 가까운 문文·사史·철哲이 통합된 인문학적 학문전통 및 그와 같은 맥락에 있는 가歌·악樂·무舞 일체로서의 악樂은, 그동안 고립적이며 편면적인 관점에서 연구되고 이해되어 왔다.
그에 따라 아악에 대한 명확한 개념적 인식을 할 수 없었고, 나아가 신악을 한국 아악으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지금과 같은,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를 키우기 어려운 세분화된 학제로서는, 피할 수 없는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학제의 세분화가, 개별 학문의 전문화와 능률화를 가속화시켜서, 연구 성과의 깊이와 비약적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필자의 새로운 주장 역시 이런 각개 학문의 개별적 연구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지만 이를 통합적이며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필자의 연구 성과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다양한 문화적 업적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연구와 소개가 있었다. 하지만 세종이 말년에 창제한 ‘신악’의 의의와 가치는,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종의 신악 창제는 당시로서는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우선 그 근본 동기부터가 중국의 아악이 아닌 우리의 독?적인 아악을 사용하려는 자주적인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중국의 한문이 있음에도 우리의 말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중국의 음악을 기보하는 악보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유의 음악을 기보할 수 있도록 따로 동아시아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였다. 따라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중국을 문화적 대국으로 섬겨야 하는 당시로서는, 단순한 아악혁명을 넘어 문화혁명이라 규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즉 세종은 조선을 문화적 자주국으로 만든 문화영웅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양의 뮤직(music)과 동아시아의 악(Ak)의 개념적 차이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아울러 아악에 대한 관점을 주체적이며 미래지향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동안 묻혀 있었던 오랜 전통을 지닌 악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회복하고, 아악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통해, 한국 음악사 또는 한국 아악사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문화경쟁력 시대에 세계 음악문화 속에서 한국 음악문화의 정체성의 확립·계승과 자긍심의 회복?선양을 위한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