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도: 자, 앉지.
우리가 이틀 밤이나 연달아 본 것을
도대체 곧이들으려 하지 않는 자네의
그 먹통 같은 귀에 다시 얘기해 주겠네.
호레이쇼: 그래, 다들 앉아서
버나도의 유령 이야기를 들어 보세.
버나도: 바로 지난밤에
북극성 서쪽에 있는 저 별이
지금 빛나고 있는 하늘의 저편으로
옮아갔던 바로 그때,
시계는 1시를 치고 있었는데
유령 등장.
마셀러스: 쉿, 조용히. 저기 보게, 다시 나타났어!
버나도: 돌아가신 선왕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군.
마셀러스: 호레이쇼, 자네가 유식하니 말을 걸어 보게나.
버나도: 선왕의 모습 그대로 아닌가?
호레이쇼: 흡사하네. 놀랍고 두려워 소름이 끼치는군.
햄릿: 아, 하느님!
유령: 극악무도하게 살해된 아비의 원수를 갚아 다오.
햄릿: 살인이라고요?
유령: 그래, 살인치고 사악하지 않은 살인이 없지만
나의 경우는 가장 사악하고, 인륜과 천륜을 저버린 것이다.
햄릿: 어서 빨리 알려 주세요.
그래서 명상처럼, 신념처럼 빠른 날개를 달고
복수에만 맹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유령: 그래야겠지.
그러지 않는다면 레테의 강둑에 태평하게 뿌리 내린
무성한 잡초보다 우둔한 녀석이겠지.
간단히 말해 주마.
내가 정원에서 잠자다가
뱀에 물려 죽었다는 헛소문에
온 덴마크 사람들이 형편없이 속고 있다.
그러나 고매한 젊은이인 너는 알아 두어라,
네 아비의 심장을 물어뜯은 자가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바로 그자라는 것을.
햄릿: 낌새가 이상하더라니. 숙부가, 숙부란 자가!
햄릿: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까지 대적하여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죽어서 잠을 잔다. 이게 전부란 말인가? 그래, 전부야.
아니, 잠을 자면 꿈을 꾸겠지. 맞아, 그것이 문제야.
사멸할 이 육신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죽음의 잠 속에서 우리는 무슨 꿈을 꾸게 될까?
그 때문에 우리는 망설이고
이 장구한 인생의 재난을 이어 가는구나.
그게 아니라면 그 누가 시대의 채찍과 조롱,
억압자의 횡포와 거만한 자의 비방,
짝사랑의 고통과 법의 게으름,
관리의 오만함과
훌륭한 사람들이 하찮은 사람들로부터
참고 받아 내는 업신여김을 견디겠는가?
차라리 단검 빼어 들고 이승을 하직하는 편이 낫지.
그게 아니라면 누가 지루한 인생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고 땀 흘리며 그 무거운 짐 지고 가겠는가?
여태껏 아무도 되돌아온 자 없는 그곳,
그 미지의 나라,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저승으로 달려가기보다
이승의 질곡을 참고 살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숙고는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
자연스러운 결단의 색깔은
뻗어 나가는 생각과 더불어
창백하게 변하는구나.
중대한 계획도 이 생각 때문에 물줄기를 틀어
실행이라는 이름조차 잃는구나. 자, 가만,
아름다운 오필리아! 님프여, 그대의 기도 가운데
내 모든 죄악들을 기억하여 주오.
햄릿: 고맙네. (호레이쇼에게) 자네는 혹시 이 물파리를 알고 있는가?
호레이쇼: 아니, 모릅니다.
햄릿: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이네. 저자를 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해악이니까. 저자는 비옥한 땅을 많이 가지고 있지. 짐승도 짐승의 왕이 되다 보면 자기 먹이통을 왕의 식탁에 올려놓게 되는가 보네. 이 농부 같은 자가, 가진 땅은 넓단 말이지.
오스릭: 왕자마마, 틈을 내주신다면 폐하의 전갈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햄릿: 성심껏 들어 보겠네. 모자는 머리에 쓰라고 있는 것이니 모자를 쓰게.
오스릭: 감사합니다. 너무 더워서요.
햄릿: 아닐세, 내 말을 믿어 보게. 사실이지 북풍이 불어오는 바람에 매우 춥거든.
오스릭: 정말 꽤 춥군요.
햄릿: 그렇지만 지금 보니 내 체질에는 무척이나 후텁지근하군그래.
오스릭: 정말 그렇군요. 매우 후텁지근하군요. 말하자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왕자마마 쪽에 큰 내기를 거셨다고 이르라고 분부하셨나이다. 전갈 내용인즉슨 --- 본문 중에서
이 작품을 읽는 것은 거울의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곳에서는 바라봄과 보임이 동시적인 현상이다.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다른 응시의 대상이 되어 있다. 마치 쫓고 쫓기는 놀이처럼 범인은 탐정이 되고 탐정은 범인이 되는 뒤바꿈이 빈번한 작품 속에서, 일과 놀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이승과 저승의 구분은 사라지며 삶의 영역은 죽음 이후의 세계로 확장된다. 햄릿의 독백처럼 죽은 후에도 우리의 불멸하는 영혼이 꿈을 꾸고 그 꿈이 바로 이 현실의 반영이라면, 죽음은 삶과의 이별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거나 재생이라 할 만하다. 허구와 실재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 작품의 미로 속에서 우리는 햄릿처럼 당당히 '나는 덴마크 사람 햄릿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리어 왕처럼 광야에서 헐벗은 영혼으로 폭풍우에 맞서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외칠 수 있을 뿐이다. 햄릿, 그 영원한 모나리자.
---「역자 해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