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인에 대한 여하한 신비주의도 품고 있지 않다. 아니, 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시인들은 타고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저 노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면 시인도 함께 소멸된다. ---「펴내며」중에서
나는 사랑을 유예한다. 잠든 사람이 반드시 꿈을 꿀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꿈을 꾸는 사람은 대부분 잠들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살아 있지도 않는 내가 잘사냐고 너에게 묻고, 그러니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_구현우, 「하나의 몸이 둘의 마음을 앓는다」중에서
나는 널 좋아해. 망했다. 그런데 우린 닮아 있잖아? 아마 안 될 거야. 동질감에 배신당하면 데미지가 더 크다. 그러니까 넌 햇살 같은 사람이나 만나려무나. 치유계 여신으로다가. 그런데 네 미래도 참 암담하다. 불안함과 강박은 숲에 버리렴. 그전에 네 숲 하나 만드는 것 잊지 말고. 언젠가, 그 숲에 동물이 뛰어다니면, 구경 가겠다. ---「나와 너에 대한 예언」중에서
내 눈꺼풀 속 밤하늘에는 웬일로 별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방문을 열면 거기엔 이름도 예쁜 네가 있고 창문틀에 앉아 햇볕 쬐는 고양이가 있고
눈이 부신 고양이는 오도카니 빛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버드맨」중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분좋은 소식이 있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미래의 일이 그립기도 하고 받은 적 없는 행복이 미리 만져지기도 하는 걸까. ---「그리운 미래」중에서
살면서 닳게 된 부분과 손쓸 수 없이 딱딱해진 부분이 닿을 때, 쓴다. 쓰는 손은 차갑고 차가운 손을 응시하는 것은 아마 따뜻함의 곤욕스러움을 잘 아는 것일 것. 나는 다정함을 벌칙으로 살고 있다. 나는 나의 슬픔을 비틀더라도 양보다 크게 울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자주 웃음이 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중에서
번지는 산빛으로 하여 산이 흔들
흔들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저 색을 뭐라고 불러줘야 하나
능선 밖으로 뿜어져나오는 색, 있는데
틀림없이 없는
저 빛깔, ---「산색(山色)」중에서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 파리한 나무 그늘 밑에서
빙빙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개에게도 나는 묻게 된다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다시 태어나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자 아픈 일을 아름답게 말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편지의 공원」중에서
시간은 코앞에서 흔들리는 탐스러운 엉덩이
올라타고 싶은 순간과 걷어차고 싶은 순간으로 뒤뚱거린다
돌멩이를 삼키는 거위처럼 ---「해는 중천인데 씻지도 않고」중에서
네 개의 계절이 있다는 것. 우리가 조금 변덕스럽다는 것, 감정이 많다는 것, 허물어지고 또 쌓는다는 것, 둘러볼 게 있거나 움츠러든다는 것, 술 생각을 한다는 것, 불쑥 노래를 지어 부른다는 것, 옷들이 두꺼워지다가 다시 얇아진다는 것, 할말이 있다가도 할말을 정리해가는 것, 각각의 냄새가 있다는 것, 우리가 네 개의 계절을 가졌다는 것. ---「네 계절」중에서
꽃을 샀다가 서둘러 탄 막차 속에서 망가져버렸다. 차마 버리지 못했다. 등뒤로 감추고 돌아왔는데 이런 예쁜 꽃다발을 어디서 가져왔냐고 환하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아주 오래도록,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가만히 웃거나 울면서」중에서
손이 시려웠겠습니다 발이 시려웠겠습니다
눈이 머리 위에 조금씩 쌓이는군요
청년들이 폭죽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잠깐 불빛에 시선을 두지만
여기를 봐야지
누군가 셔터를 누릅니다 ---「동화」중에서
칼로 물 베기의 예술을, 이번엔 누구에게 보여줄까
칼처럼 고요히 누워 있는 물을 누구에게 먹여줄까? 누구 목에 부어줄까?
(…)
마침내 난 내 모든 걸 다 바쳤다! 라는 기분이 들 때쯤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잔뜩 들어찬 글자들로 붐비는 아침은 올 것이고
너는 이윽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말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어쨌거나 오늘은
너의 엄청난 힘이 내 위에서 쓰러지는 게 나는 좋다
---「초자연적 3D 프린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