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셰어하우스는 용두암과 용연구름다리가 걸어서 이십분 거리에 있고, 공항까지 버스로 이십분이 걸리는 구제주의 한 동네에 있었다. 그곳은 이제 제주의 우리 집이 되었다. 우리 집은 정말 깨끗하고 정돈이 잘 되어있어서 벌레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 점이 내가 우리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오 분정도 걸렸다. 그것은 차 없이 일과 여행을 병행하는 입장에서 여러모로 큰 장점이었다. 우리 집은 서울, 부산, 대구, 거제도, 성남 등 전국구인들의 거처였다. 연령대도 참 다양했다.
하지만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곁에는 바다라는 든든한 비상구가 있었다. 집 앞에 있는 바닷가로 산책만 다녀와도 스트레스는 훨훨 날아간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실 우리 집이라 하면 내 두 다리 쭉 뻗고 잠잘 곳만 있으면 됐다. 우리 집은 정말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집이었고, 장르는 낭만적인 드라마보다 시끌벅적한 시트콤이었다.
대구은행에도 계좌가 없는데 제주은행에 계좌를 만들 줄이야. 이로써, 이번년도 일복이 좋다는 법칙은 제주에서도 증명되었다. 그토록 원했던 직장인데, 처음 본 면접에서 바로 합격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소개서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칭찬도 덤으로 들었다. 내일부터 당장 일을 해야 하는데도 행복했다. 직장을 구함으로써 '한 달 살기'에서 '원할 때까지 살기'로 승격된 셈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득과 실이 공존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맑은 가을날에 출근은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오전 아홉시, 전국의 수많은 직장인이 회사를 향해 걷고 있거나 이미 회사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 제주도인데! 면접도 늦게 본편인데 입사 일까지 늦춘다면, 혹시나 간절히 바랐던 직장에서 일을 못하는 상황이 올까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 나의 업보라면 업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강한햇빛에 눈도 시리고 마음도 시린 채 첫 출근을 했다.
지금 날씨가 이래서, 까마귀가 이렇게 많이 울부짖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추측이 맞는지 궁금했다. “여기는 사시사철 까마귀가 우는 곳이지. 이게 반기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이제껏 겁먹었던 모든 환경들이 스스로 가둔 공포 속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비원 아저씨께도 사진을 한 장 부탁드렸다. 차마 민망해서 기념으로 같이 찍자는 말까지 내뱉진 못했지만. 그리고 거의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해주신 그 마음덕분에, 더 이상 까마귀의 울음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빽빽하게 우거진 커다란 숲은 이제 따뜻하게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삼각대가 여행에서 사라진 건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더 적극적으로 걸게 되었으니. 사진만큼 좋은 핑계가 없었다. “저기 혹시 사진 한번만 찍어주실 수 있나요?” 당장 버스를 타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대부분 흔쾌히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저도 찍어드릴까요?” 답례를 할 때도 있었다. 사라진 삼각대는 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주었기에, 제주를 떠날 때 까지 새로운 삼각대를 사지 않았다.
제주에 한창 적응하려 발버둥 치던 시절, 비상구가 필요한 날들이 있었다. 퇴근 후엔 멀리 가기도 힘들었고 그럴 기력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용두암이 있었다. 밤공기를 맡으며 느릿느릿 걸었다. “무슨 시끄러운 소리 들려” “아 비행기소리야. 여기 공항근처거든.” 보고 싶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일기를 쓰듯이 이야기하면 우울함이 조금은 가셨다. 또 방파제 앞에 앉아서 까마득한 밤바다를 보며, 그 위로 오가는 시끄러운 비행기소리를 들으면, 마음은 반대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너는 여행자야. 지금을 즐겨.’ 바다는 조용히 위안을 준다. 기댈 구석이 되어준 집 앞바다가,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그립고 그립다.
태풍 ‘차바’가 덮쳤을 때 정작 당사자인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내 핸드폰에는 육지친구들의 걱정 섞인 메시지가 쌓이고 있었다. 사면이 육지인 대구에 살았을 때는 물과 관련된 재해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흘려들은 것도 같다. 그러니 제주도에서도 바다 앞에 살면서, 대단한 태풍이 오는데 비교적 태평했다. 평소대로 잠들었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거실이 좀 습하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검색순위 상위권에 오른 ‘제주도 태풍’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자다가 뛰쳐나온 사람들과, 물에 둥둥 뜬 차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기사를 읽었다. 이건 정말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앞집과 옆집 이야기였다.
매일 다른 천장을 만나는 여행 덕에, 숙소에서 많은 인연을 스쳤다. 한편으론 세상의 구석에 방문한 듯 했다. 건강을 챙기지 못해서 숙소에서의 비중이 높았지만, 나에게는 숙소까지도 여행지였기에, 다양한 추억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여섯 개의 게스트하우스는 각자 개성이 워낙 뚜렷해서, 기억도 또렷하다. 최대한 객관적 이려고 했지만, 최고로 주관적일 수 있다. 이건 어쩔 수 없이 내가 느낀 것들이니까.
어린 나에게 온 작은 가르침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새겨지고 또 새겨져서 마침내 습관이 되었다. 여행도 일상도 그렇게 극복을 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들의 길에 눈 돌리지 않고 꿋꿋이 견뎌냈다. 그리고 나뿐이라고 생각했던 길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고, 처음처럼 외롭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 새로운 길로 갈 준비를 하고, 설레는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 서있다. 확실한건 예전보다 훨씬 덜 흔들리며, 또박또박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내 발걸음이 첫 번째로 새겨진대도 그 길을 믿기에. 이 굳센 믿음은, 틀림없이 그때의 제주가 준 선물이겠지.
“말 타러왔어?” 기웃거리는 우리에게 귤을 팔고 있는 할머님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그 분 아까 어디 가던데.” “그럼 오늘 하기는 하시는 거겠죠?” “그럼 저렇게 말들 두고 갔으니 오겠지” 무작정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는 와중에 안심이 되었다. 어쩔 수없이 우도를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귤 하나만 주세요.” “우리 귤 맛있어. 고마워요.” 할머님께 귤 한 봉지를 사서 택시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귤은 달았고 우도에 가서도 좋은 간식이 되었다. 택시기사님과 오순도순 성산일출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선착장으로 갔다. 제주방언이 넘치는 대화는 참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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