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수명이 길면 6개월, 짧으면 3개월입니다.” 너무 당황해서 계속 눈만 껌뻑거렸다. 대체 지금 뭐라는 건지……. 온몸이 굳어 버려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그러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도무지 주체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목이 갈라져 쉰 소리가 나고 눈물마저 말라 버려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쯤, 그제야 현실이 보였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빠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시한부 선고는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아빠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무심코 스쳐 보냈던 표정, 말, 행동, 몸짓이 내 눈과 가슴에 스미듯 담겼다. 아빠를 바라보는 일분일초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뒤늦게나마 아빠를 알고 싶었다. 돌이켜 보니 아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왜 그토록 집을 떠나기 싫어했는지, 가장이 아닌 아들로서의 삶은 어땠는지, 나의 결혼식 내내 왜 무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는지. 아빠의 딸로서 서른다섯 해를 사는 동안 외면하고 깨닫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프롤로그」중에서
“그나저나 병원이라면 질색을 하는 아빠인데 어떻게 모시고 온 거야?” 엄마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돌았다. “하여간 신임이는 정말 대단해. 아빠한테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더니 절대 안 간다고 고집부리는 거야. 혈압이 팍 오르더라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신임이한테 전화했지. 아빠 좀 설득해 보라고 했는데, 신임이랑 잠깐 통화하고 나서 아빠가 바로 병원에 가자고 하더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언니를 쳐다봤다. 작은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별 얘기 안 했어. 아빠가 병원 운영 중인 거 알지 않느냐, 그 병원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보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을 뿐이야.” 작은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가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병원까지는 쉽게 왔어. 그다음에는 환자복을 갈아입혀야 하는데 또 고집을 부리는 거야. 그래서 신임이한테 다시 전화했지. 이번에도 아빠가 가만히 듣더니 알겠다고 하더라고. 전화를 끊고는 순순히 환자복으로 갈아입었어.” 이번에는 또 어떻게 한 건지 얘기해 보라는 눈짓으로 언니를 재촉했다. “아빠, 잘 들어 봐. 거기가 아빠 병원인데, 병원 대표로서 환자들이 뭐가 불편한지, 개선할 점은 없는지 직접 체험해 봐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입원한 김에 환자 체험을 해 보자.” 신기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통한다는 것이. ---「병원장이 된 아빠」중에서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품고 지낸 또 한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무려 35년이다. 아빠가 막내딸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온 세월이. 나는 지금껏 그 마음을 제대로 보듬은 적이 없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래 왔듯, 아빠도 막내딸이 태어나던 순간의 밝은 기억만 남겼으면 좋겠다. 그날의 일이 미안함 대신 아빠의 인생에 기쁨과 희망의 씨앗으로 심어지기를 바랐다. “아니야, 아빠.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그나저나 아무래도 내가 어마어마한 사람이 될 건가 봐. 그렇게 훌륭한 탄생 신화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말이야. 이건 정말이지, 보통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미안해하지 않기! 알았지?” “그래,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 주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아빠의 사과」중에서
“언니는 아빠가 우는 모습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 “그냥…… 의외였어. 그동안 아빠가 남자는 평생 동안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말해 왔거든. 태어날 때, 부모님 돌아가실 때, 나라가 망할 때. 그랬던 사람이 우니까 ‘아빠가 이럴 때도 우네’라고만 생각했지.” 눈과 코가 벌게져서 울먹이는 동생을 보고도 큰언니는 여전히 덤덤했다. 언니는 고개를 돌려 잠든 아빠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언니가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병원에 있던 며칠 동안 아마 아빠는 밤새 한숨도 못 잤을 거야. 몸이 아프니 병원에 오지는 못하고, 혼자서 많이 끙끙거렸겠지.” 아빠를 향해 시선을 돌린 큰언니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니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다는 것을. 그 모습을 동생에게 들키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아빠가 큰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서툰 사랑」중에서
혼주석에 앉은 아빠가 물끄러미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웃으며 입장하는 막내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인다. 양손을 모아 깍지를 낀 탓에 어깨가 더욱 처져 보이는 아빠. 힘이 없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한 모습이다. 어떤 일에도 기죽지 않던 특유의 당당함은 사라져 버렸다. 다시 고개를 들어 점점 가까워지는 막내딸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무릎으로 시선을 다시 내린다. 아무래도 내가 아빠를 창피해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언젠가 아빠가 집에 오자마자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해하며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수도관 공사 현장에 있는데, 깡패 이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는 ‘아빠다!’ 하면서 달려와 아는 체 하더라고. 먼지를 뒤집어써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데, 자기 친구들한테 인사까지 시켰어.” 돌이켜 보니 가장으로서 아빠의 속마음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말이었다. 내 기억 속에 아빠는 늘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한 자신의 초라함을 들키지 않으려던 노력이었다. ---「슬픈 결혼식」중에서
어쩌면 아빠는 내가 봐 왔던 것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이 닥칠 때마다 애써 힘을 냈던 것이다. 딸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나 역시 부모가 된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어린 자식의 반짝이는 눈빛은 세상 어떤 것보다 크고 강하다. 자식 앞에서라면 숱한 절망과 위기 속에서도 씩씩하기만 했던 아빠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서른세 살이나 어린 막내딸 앞에서. 너무 무서워서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은발의 아빠를 보며 부모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깨달았다. 시술실에 들어가기 전 아빠는 줄곧 내게 의지하는 모습이었다. 시선은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나와 점점 멀어지면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시술이 끝나고 밖으로 나온 순간, 아빠는 공포와 절망이 가득한 터널에서 겨우 빠져나온 사람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아빠가 울던 날」중에서
아빠는 필사적으로 거즈를 빨았다. 그 모습을 그저 안타깝게만 바라보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빠는 단순히 목이 마른 게 아니었다. 암 극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이겨 내겠다는 환자 본인의 의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치매인 아빠는 본인이 말기 암이라는 것을 모르니 말이다. 최근에는 기력이 점점 쇠약해져서 잠만 자려 했다.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아빠가 죽기 살기로 젖은 거즈를 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의지였다.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 안타까움과 절망이 뒤섞인 상황 속에서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아빠는 가족을 두고 쉽게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응급실에서 발견한 빛」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