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가 전문적인 의무 부대를 만들기 전까지는, 지휘관 대부분이 군대 내 부상자나 환자에게 무관심했다. ‘병사를 아끼는’ 몇몇 사령관만 사비를 들여 의사를 고용해 부하들을 치료해주었다. 기원전 30년경부터 아우구스투스는 병사들의 전투력과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의무 부대를 창설했다. 이 전문적인 군 의료 체제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능력 있는 의사들을 입대시키기 위해 군의관에게는 여러 혜택을 주었다.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로마 시민권을 보장하고, 은퇴 후에 는 연금과 면세 혜택까지 주었다. 제국 초기 군의관들은 그리스의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진료법과 수술법을 교육받은 그리스인이었다. 덕분에 로마의 의무 부대는 과학적인 전문성을 지니게 되었다. 나중에는 군의학교를 설립하고 의학 서적을 출판해 진료와 수술 방법을 체계화하고 통일시켰다. 새로운 치료법이 확립될 때마다 의학 서적 개정판에 포함시키는 발전을 보이기도 했다.
--- p.44~45
전쟁터에서 활약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나이팅게일은 고국의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인기를 토대로 정치력을 발휘해 1860년에는 런던 성 토마스 병원에 간호학교를 설립했다. 또 『간호 노트』라는 간호 전문 서적도 편찬했다. 1858년 나이팅게일은 영국 왕립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된 명실상부한 통계학자이기도 했다. 나이팅게일 이후 환기, 보온, 주택 위생, 청결, 소음 관리 등 환경 개선이 주요한 간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간호사 윤리와 간호 원칙을 담은 「나이팅게일 선서」는 1893년에 제정되었다. 선서식 때 간호학도들은 손에 촛불을 들고 하얀 가운을 착용한다. 촛불은 주변을 비추는 봉사와 희생정신을, 흰색 가운은 이웃을 따뜻하게 돌보는 간호 정신을 상징한다.
--- p.82~83
더 나은 치료법을 찾던 매킨도는 바다로 추락한 조종사가 다른 이들보다 흉터가 적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여기서 화상 환자를 식염수로 목욕시키는 방식을 개발했다. 이 방식은 타닌산을 이용하는 것보다 환자의 고통을 훨씬 줄여줄 뿐만 아니라 안전했으며, 치료 기간도 단축되고 생존율도 높았다. 매킨도는 피부 이식을 적용해 넓은 부위의 화상을 치료했고, 구축된 관절의 재활을 강조하는 등 현대 화상 치료의 기반을 마련했다. 매킨도는 열일곱 편의 논문을 썼는데, 그중 두 편은 길리스와 공동으로 저술했다. 그가 1946년 발표한 「손상과 관련한 외과의 책임」을 보면 환자의 재활 치료에 얼마나 선구적인 안목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이 논문에 실린 가장 감동적인 구절을 소개해보겠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언제나 환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딱딱한 논문에서도 환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 p.111~113
전쟁이 끝나고 독일의 생체 실험 의사들이 공개재판을 받은 데 반해, 일본의 경우 이시이 시로를 포함한 731부대의 책임자들과 의사들은 축적한 자료를 미국에 넘기는 조건으로 전범 재판을 면했다. 수만 쪽에 달하는 실험 보고서를 은폐한 가해자들은 조용히 ‘일상’으로 복귀했다. 훗날 중국이 전범 재판을 열어 그중 몇 명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또 전범들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된 것은 필연이 아닐 수 없다. 의학이 인간의 가치와 생명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 없이 오로지 이념과 애국심이라는 가면을 쓴 악마와 손을 잡으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와 731부대의 생체 실험은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으로 여실히 증명한 사례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윤리 없는 과학의 마수를 오롯이 드러냈다.
--- p.129
야전병원은 본래 전선에 가까운 후방에 설치하는 임시 병원으로 전쟁 상황에 따라 이동한다. 그러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철수할 때까지 계속 부산에 남아 있었다.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전선에 가까운 함경남도의 흥남과 원산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중공군의 참전과 유엔군의 후퇴로 최후방에 남게 된 병원은 야전병원에서 후송병원으로 기능이 바뀌었다. 전상병들은 항공편이나 열차편으로 부산으로 후송되어 이 병원에 입원했고, 그중 상태가 위중한 부상병들은 항공기와 선박으로 일본이나 미국으로 후송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부산 스웨덴 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1957년 4월에 한국을 떠날 때까지 스웨덴 병원이 부산에 체류한 6년 6개월 동안 1,124명의 스웨덴인이 일했고, 20개국 국적의 200만 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했다. 전후 열악한 한국의 의료 환경에서 부산 스웨덴 병원은 수준 높은 의료를 제공했다. 지금은 기념비만 남아 있지만, 진흙 같은 전쟁통 속에서 연꽃 같은 의술을 꽃피웠던 것이다.
---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