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선택이라는 개념과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 수집의 한가운데에 세 번의 항해와 세 명의 영국인 자연과학자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다름 아닌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다. 다윈이 자연사와 진화 이론 연구에 기여한 바는 매우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어떻게 그 배에 올랐는지, 그의 견해와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됐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못 이해되기도 했다.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비글호에 올랐던 신학생 한 명이 미래에 혁명적 이론을 제시할 사람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항해를 시작할 때만 해도 다윈에게 그 어떤 위대한 이론을 지지하거나 반박할 증거를 찾으려는 의도 따위는 없었다. 그의 진화 이론이 구체적 형태를 띤 것은 항해가 끝나고 자신이 그곳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 혼자 생각하기 시작하면서였다. 반면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와 헨리 월터 베이츠는 항해 시작부터 진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의 종이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1840년대 중반 이미 지식인 사이에서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친구인 베이츠에게 함께 아마존으로 가 ‘종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풀’ 자료를 모으자고 제안한 것은 바로 월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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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동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네덜란드의 유력 의학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을 것이 분명한 전도유망한 젊은 의사이자 해부학자가 도대체 왜 그것을 모두 던져버리고 네덜란드 군대와 함께 1만 6,000킬로미터나 떨어진 동인도 제도로 가겠는가? 게다가 제정신이라면 그렇게 멀고 위험한 이국땅에 아름답고 젊은 아내와 갓난아기를 데려갈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자연선택에 관한 월레스와 다윈의 첫 번째 논문이 세상에 나온 바로 그해에 태어난 29세의 의사 마리 외젠 프랑수아 토머스 뒤부아가 동인도 제도에서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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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알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주변을 기어 다니고 있는 동안 올슨이 바로 옆, 삐죽 튀어나온 암석 위에 있던 돌덩이를 하나 치웠다. 놀랍게도 그 암석 아래, 알에서 단 10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몸집이 작은 공룡 유골이 발견됐다.133 그 공룡은 당시 과학계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후에 오스본 교수는 그것이 알을 훔쳐가려던 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그 새로운 종을 오비랩터(알 도둑)라 이름 붙였다.
며칠 후, 한데 모여 있던 알 다섯 개가 더 발견됐고 그다음에는 아홉 개가 추가로 나왔다. 그중 두 개는 반으로 쪼개져 있었는데 속에 든 공룡 새끼의 골격이 그대로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해 총 스물다섯 개의 알이 발견됐고 그 후로도 몇 년간 알은 계속해서 발굴됐다.
그러나 이것은 보물찾기의 끝이 아니었다. 대원들은 반경 약 5킬로미터 내에서 공룡 두개골 일흔다섯 개를 찾아냈다. 하지만 발굴량이 그렇게 많다 보니 문제점도 있었다. 발견된 표본은 밀가루 반죽을 흠뻑 묻힌 천으로 감싸 포장했는데, 3주 만에 가지고 온 밀가루를 거의 다 써버린 것이었다. 로이는 대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표본 찾는 것을 중지할 것인가, 아니면 밀가루를 그냥 다 써버릴 것인가? 대원들은 만장일치로 “먹을 밀가루도 작업용으로 쓰자.”라는 데 의견을 모았고 덕분에 이제 대원들이 먹을 것이라고는 차와 고기뿐이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표본을 싸는 데 쓸 천도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대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장 먼저 텐트 가장자리에 달린 덮개들이 잘려져 나갔다. 그것이 다 떨어지고 난 후에는 대원들이 쓰던 수건과 행주 차례였다. 그것마저 다 없어지고 난 후에는 대원들의 옷을 쓰기 시작했다. 양말, 바지, 셔츠, 속옷, 심지어 로이의 파자마도 표본을 싸는 데 들어갔다. 그들이 가져온 공룡 중에는 오스본이 새로운 종이라고 확인한 것들이 있었는데 발톱이 크고 민첩한 육식공룡 벨로시랩터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와 비슷한 타보사우루스가 이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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