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멈춘 그 발코니의 자리에 서서 이제부터 관객은 곰곰이 생각에 잠길 것이다.
--- p.67, 「아사코」 중에서
인물들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격랑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지 않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종결법은 그 자체로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 각자의 마음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되게 하려는 제언처럼 여겨진다. 단 하나의 정답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영화는 이렇다.
--- p.155, 「세 번째 살인」 중에서
그러니까, 들은 자는 말해야 한다. 말해야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 이야기가 생명을 갖는 것은 오직 이야기될 때뿐이다.
--- p.187, 「몬스터 콜」 중에서
여기서 기억은 결국 불쑥불쑥 틈입해 들어오는 경험의 편린이 아니다. 부서지고 쪼개지는 망각에 힘을 다해 맞서는 저항의 결실이다. 이 이야기에서 갈라지는 것들은 파괴력을 가졌지만 이어지는 것들은 치유력을 지녔다. 이름을 묻고 또 물으며 잊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쓴 흔적이 결국 매듭이 되어 둘을 연결하고 비극의 구멍을 메운다. 이 영화에 담긴 감동의 태반(太半)은 안간힘이다.
--- pp.278~279, 「너의 이름은.」 중에서
그러니까 삶의 모든 시절에는 그 시절만의 치열한 문제가 있다. 세월이 흐른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저 문제가 달라질 뿐이다. 그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아무리 절실하고 간절해도 아이들은, 그들은, 우리들은, 자꾸 미끄러진다. 다만 「우리들」은 손톱 끝에 겨우 남은 봉숭아 꽃물을 바라보며,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다짐하고 있을 뿐이다.
--- p.329, 「우리들」 중에서
‘오직 그대만이’라는 고유성은 결국 세월 속에서 ‘다른 누구라도’라는 익명성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마는 것일까. 아픔을 남기며 끝났다고 해서 그 경험 전체가 부정되어야 하는 걸까. 「아노말리사」에서 유일하게 마이클의 시점을 벗어난 종반부 리사의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곱씹어보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p.348~349, 「아노말리사」 중에서
수많은 영화들이 마음의 궤적과 파장을 스크린에 담아내기 위해 애쓴다. 새로 찾아온 감정이 삶의 행로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전까지 누적된 기나긴 시간 전체와 겨뤄서 이겨야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영화들은 순간이 세월을 삼키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가정하고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루카 과다니노의 「아이 엠 러브」는 그 순간의 에너지와 방향성을 창의적이고도 폭발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 묘사함으로써 관객을 납득시킨다. 이 영화의 숏과 신은 종종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이 고전적이고 우아하면서 야단스러울 정도로 감각적인 영화를 보면서 무시로 일렁거렸던 내 마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 pp.406~407, 「아이 엠 러브」 중에서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 나면 당신은 새삼 이 영화 주인공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나의 계절이 끝난다고 시간까지 멈추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계절에는 그 계절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계절은 흘러간다. 그렇게 흐르는 계절을 따라 사랑도 삶도 끊임없이 흘러간다. 어쩌면 계절이나 사랑 혹은 삶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흐름 자체인지도 모른다.
--- pp.481~482, 「500일의 썸머」 중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러티브를 격렬하게 뒤흔드는 대신 조용히 마음의 골짜기를 판다. 이 영화의 대사는 거의 대부분 간접 화법으로 에둘러 가지만, 어김없이 과녁에 적중한다. 인물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모든 대사들은 언제나 들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한다. (미소를 지으면서 상대의 아픈 구석을 매섭게 찌르는 말들이 종종 비수처럼 느껴진다.)
여기서는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프레임 밖에 있다. 흔하디흔한 플래시백 한 번 쓰지 않지만, 오래전에 이야기 밖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삶 전체를 덮는 진원이 되어 세월을 넘어도 쇠하지 않는 흔들림으로 끊임없이 반복 회귀한다. 어떤 사건은 영원한 여진으로 남는다.
--- pp.535~536, 「걸어도 걸어도」 중에서
그리고 노래가 멈추고 여자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 관객은 깨닫는다. 설령 영화에서 구원의 사다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어떤 영화는 깊은 우물 같은 위로를 건넨다는 것을. 극 중에서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는 드라마틱한 굴곡이 없다. 영화 속에서 남자나 여자가 혼자 노래하는 순간의 쓸쓸함은 둘이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도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노래할 때 빈 하늘을 외로이 떠돌았던 영혼들은, 둘이 함께 노래할 때 지친 나래를 접고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음표 위에서 잠시 쉰다. 그걸로 족하다. 그게 이 생에 허락된 휴식이라면.
--- pp.682~683, 「원스」 중에서
「타인의 삶」의 동력은 시선의 감응력이다. 한 사람을 세심하게 지켜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을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 언뜻 도청 전문가의 딜레마를 다룬 프랜시스 코폴라의 「컨버세이션」과 비슷해 보이는 이 영화는 사실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Krotki film o milosci)」이나 폴 슬레탄느의 「정크 메일(Budbringeren)」 같은 작품에 맥이 닿아 있다.
이 영화는 타인의 삶이 내 삶의 일부로 삼투되어 오는 순간에 번지는 휴머니즘의 기운을 따스하게 포착한다. 공감할 때 바뀌는 것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다. 공감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상태에 이입하기 위해서 기꺼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태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극 중 철저한 악인으로 묘사되는 헴프 장관(토마스 티메)이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아”라고 외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pp.759~760, 「타인의 삶」 중에서
성장은 이루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노력의 보상이라기보다는 고통의 대가에 더 가까울 성장은 폭압적인 시간의 속성을 반복적으로 학습시킨 끝에 불현듯 찾아온다. 많은 성장영화가 성장을 거부하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p.785~786, 「피터팬의 공식」 중에서
「브루스 올마이티」엔 이 온화하고 속 깊은 코미디의 수준을 짐작케 하는 장면이 나온다. 브루스가 처음 찾아갔을 때 작업복을 입은 신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온갖 소동 끝에 다시 신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도 브루스는 약속대로 신과 함께 나란히 서서 청소를 한다. 남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란 사실 뭔가를 만들어내고 강제할 수 있는 앞자리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뒤치다꺼리하고 세상의 오점을 닦아내는 뒷자리일 게다. 심지어 하나님도 대걸레를 들고 직접 바닥을 닦으신다는데.
--- p.859, 「브루스 올마이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