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파벨 알렉세예비치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구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별다른 할 일이 없는 저녁식사 전 시간을 이용해 가끔 아버지 알렉세이 가브릴로비치의 서재에 몰래 숨어들곤 했다. 잠입에 성공하면 서재 한 쪽에 서 있는 스위스제 책장의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당시 유명했던 의학백과사전 중 세 권을 조심조심 꺼냈다. 파벨은 아버지가 특히 귀하게 여기는 그 책들을 네덜란드제 벽난로와 책장 사이의, 좁지만 쾌적한 공간에 들어가 바닥에 펼쳐놓았다. 백과사전의 각 권 마지막에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림은 검고 짧은 콧수염에 뺨이 장밋빛으로 불그스레한 남자와, 태아를 보여주기위해 자궁이 드러난 만삭의 여자를 묘사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 나체의 여자 그림 때문에 파벨은 의학백과사전에 대한 자신의 깊은 관심을 가족들에게 숨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음탕한 아이로 오해받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린 소녀들이 지칠 줄 모르고 인형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듯, 파벨도 몇 시간이고 앉아서 그림의 인체를 보며 모든 장기(臟器?)들과 놀았다. 마분지의 사람들을 통해 피부조직과 붉고 건장한 근육조직, 간장과 허파, 뼈의 구조와 위치 등을 세세하게 살폈다. 뼈는 탁한 누런빛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마치 죽은 것 같았다. 죽음은 겉으로 살아 있는 육신에 덮여 언제나 인간 몸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이것은 먼 훗날 파벨이 깊이 생각하게 될 문제였다. --- pp.6-7
조상 대대로 의학에 몸을 바친 외에 쿠코츠키 집안 남자들은 아주 독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전리품을 취하듯 배우자를 얻었다. 증조할아버지는 포로로 잡힌 터키 여자와 결혼했고, 할아버지는 카프카스의 체르케스 여자와, 아버지는 폴란드 여자와 결혼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여자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의 혼을 빼앗을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처럼 이방인의 피가 섞이는 바람에, 대대로 턱뼈가 높고 완강하며, 일찍부터 대머리가 되었던 남자들의 외모가 조금씩 변해갔다. 파벨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는 아브데이 페도로비치의 초상화는 유명하지 않은 독일인 판화가가 만든 것인데, 그 초상화는 혼혈로 인한 쿠코츠키 혈통의 변화를 또렷하
게 보여주고 있다.
파벨 알렉세예비치 쿠코츠키도 전쟁 중에 결혼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몹시 서둘러 치러진 결혼이었다. 그의 아내가 된 엘레나 게오르기예브나는 포로도, 인질도 아니었다. 파벨이 근무하던 병원은 전쟁을 피해 시베리아의작은 도시 B로 피난을 갔다. 1942년 11월, 그 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파벨은 엘레나를 처음 만났다. 호출을 받은 파벨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엘레나의 수술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모두가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수술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버린 듯했다. 회생의 가능성은 너무도 희박했다……. --- pp.15-16
“아빠, 난 몰랐어요. 도대체 내가 2년 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쥐들을 죽였죠. 쥐들을 산더미처럼 죽였어요. 아무 거리낌 없이 간단하게요. 그러면서 난 조금씩 부서져가고 있었던 거예요. 아주 조금씩……. 그러다가…….이제 눈에 씌워진 콩깍지가 벗겨져서 알게 된 거라구요…….”
“아니야, 아니야! 타냐, 그건 아냐! 세상의 가치엔 위계가 있어. 물론 인간의 생명이 가장 상위에 있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의 질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라면, 실험실에서 수만 마리, 그래, 필요한 만큼 동물들을 죽일 수도 있어. 거기에 문제는 없어.”
“아빠, 내가 말하는 게 그게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난 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나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거예요. 내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구요!”
타냐는 놀라울 만큼 마른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내저으며 소리쳤다.
“무슨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단지 일의 특성상 일시적인 갈등이 생겼을 뿐이지. 일시적인 침체기는 있는 거야. 그런 일은 언제나 있을 수 있어.”
“그냥 단순한 침체가 아니라구요. 아빠!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난 연구라는 핑계로 쥐들을 광주리에 한 가득 넣고 자르고 또 잘랐어요. 사람들을 위해, 거기에서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 말이죠. 그러면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 개념을 상실하고 있었던 거예요. 쥐와 사람이 다르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조차 아예 잊고 있었어요. 그러니 인간의 태아에 필요한 먹물을 달라고 하는데, ‘산 거, 죽은 거’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물었던 거예요. 정말이지 있을 수도 없는…… 난 더 이상 쥐들을 죽이면서 좋은 딸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타냐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파벨은 벗겨진 이마 위로 주름살이 모일 정도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앞으로 뭘 하고 싶은 거니?”
타냐는 이미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파벨은 그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난 무엇도 자르지 않는, 나쁜 딸이 되고 싶어요!”
--- pp.291-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