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처음 구상할 때 나는 만들어진 죽음에 대해 쓰고자 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죽음이 범람하는 바람에 길을 헤매는 사신(死神)과 그를 안내해주기 위해 탄생한 반. 반은 죽음의 장소로 사신을 불러들이는 안테나이자 안내자 역할이었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자꾸 망설였다. 반의 미숙함과 상관없이 그가 마주하는 밤의 실체가 더없이 뚜렷하고 잔혹한 탓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밤이 탄생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거리에 밤의 씨앗을 흘리고, 누군가는 그림자처럼 발끝에 매달린 밤을 지르밟으며 걷고, 누군가는 폐로 스며든 밤의 기척에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렵다. 그리고, 슬프다.
--- 「작가의 말」중에서
저기요, 아저씨. 저 좀 보실래요?
주혁이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에서 앳된 목소리 하나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방 싱크대 위, 물이 반쯤 채워진 목이 긴 화병에서였다.
--- p.9
조금 전의 행동이 괴롭힘인지 장난인지 실수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걔는 뭐랬는데? 어처구니없어진 우철이 묻자 아이는 웃었어, 라고 말했다.
― 날 보고 웃었어.
― 그래서?
― 그래서, 괜찮은 건가 했어. 웃는 걸 보니 괜찮은 건가보다 싶어서, 그냥 나도 웃었어.
--- p.55
우철은 앞에 선 남자와 노란 치마저고리를 번갈아 보았다. 선녀라는 이름을 꼭 여자만 쓰라는 법은 없지만 이건 너무. 우철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장면에 진저리를 쳤다. 장군이든 선녀든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철은 남자가 혹시 선녀 목소리 비슷한 것을 낼까 봐 경계했다.
--- p.60
……혼란스러웠습니다. 갑자기 모든 게 다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팀장이 진짜 악의적인 마음을 품고 저를 추행한 건지, 주연 누나가 저를 끌어안고 달래듯 친근하게 대한 건지, 주연 누나와 다른 사람들이 보고 들었다는 그 순간들이 진짜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그들이 모종의 이유로 왜곡하고 부풀려놓은 가상만 존재하는 건지.
--- p.88
― 근데 수호신이랑 사신은 투잡으로 좀 이상하지 않아요? 바이러스랑 백신 같은 느낌이잖아요.
― 너, 사신은 아니야.
― 내가 아저씨 수호신이라는 건 인정하는 거네요?
― 수호신은 개뿔.
--- p.104
가로등 꼭대기에 올라 알전구를 갈아 끼우는 남자가 되고 싶던 날이 있었다. 연애 시절 영주의 방을 올려다볼 때마다 주혁은 가로등에 매달린 자신의 뒷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영주의 자취방은 그들이 다니던 대학 뒤 복잡한 골목 안에 있었다. 천장이 낮고 방범창이 두꺼운 빌라들. 모퉁이마다 박아놓은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노랗게, 고깔 모양으로 번지는 곳이었다. 가로등은 영주의 방과 정확히 같은 높이였고, 영주는 방에 들어가선 불을 켤 필요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 그래서 잠을 못 자, 너무 밝아서
--- p.105
― 도형. 삼십대엔 입체도형을 하나 갖게 돼. 근데 그게 참 보잘것없거든. 가까스로 세워놔도 쉽게 찌부러지는 애물단지지. 그래도 노력해온 게 있으니 다들 그걸 지키고 싶어 해. 인간으로서의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봐야지. 지킬 게 생기면 인간은 끈질겨지거든.
― 그때까진 인간이 아닌 건가요?
― 뭐, 기대하진 말아야지.
― 단순하다더니 엄청 복잡하네요.
― 점 선 면 도형. 딱 기본이잖아.
--- p.111
― 그 선생님 어떻게 지낼까요?
― ……잘 지내겠지.
― 그치만 아기가 죽었잖아요.
― 고작 점 하나일 뿐이야.
주혁이 말했다.
― 내가 전에도 말했지, 어린애는 쓸모없는, 아주 사소한 점 같은 거라고.
― 작고 귀중하다고도 말했죠.
―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점이야.
― 선도 면도 도형도 될 수 있는 그 점 말이죠.
--- p.193
― 오자? 틀린 글자?
― 네.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하실래요?
― 뭘 어떻게 해?
― 아저씨가 사라져야만, 완벽하게 지워져야만 책이 완벽해진다면.
― 그럼 지워져야지.
― …….
― 그런데 완벽한 책이란 게 그렇게 허술해도 되는 거야? 오자 하나 찍혔다고 망가진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