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버크 본인은 배교자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당시에 아일랜드에서 출세하기 위해 개신교로 개종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도 그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리처드가 개종했든 그의 조상 가운데 개종한 이가 있든 상관없이, 에드먼드는 단순히 종교만 다른 게 아니라 계급과 삶의 궤적이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에드먼드의 부모는 아들들은 개신교도로, 딸인 줄리아나는 가톨릭교도로 키웠다. 도시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개신교도여야 미래가 있었다. 가톨릭과 시골에서의 삶은 과거 지향적이었다. 그러니 충성심이 갈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버크가 탁월한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귀족과 혁명가,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하류층과 상류층을 모두 이해하고 다방면에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 pp.25-26
그러나 버크는 이러한 견제와 균형을 논하려면 분명히 구분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는 기발한 주장을 펼친다. 파벌(派閥)은 정당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계파는 당장의 필요에 따라 무리를 이룬 이들로서, 권력을 잡고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버크가 말하는 “상당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무리는 파벌이 아니다. 정당이다. 즉, 이들은 “모두가 동의하는 특정한 정치적 원칙을 토대로 함께 국익을 추구하고 신장시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그러한 무리가 파벌인지 정당인지 여부는 집권에 실패했을 때 판가름 난다. 사익을 바탕으로 모인 파벌은 집권에 실패하면 해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당은 집권에 실패해도 지속되고 구성원들은---원칙과 공동의 가치관, 상호 헌신과 충성심과 동지애를 바탕으로---집권할 기회가 올 때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 pp.105-106
그렇다면 버크가 생각하기에 사회계약은 존재한다. 그러나 홉스, 로크, 루소가 생각하는 사회계약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사회계약이다. 홉스에게 사회계약은 군주가 통치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토대다. 로크에게 사회계약은 인간이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고 누리기 위한 실용적인 수단이고, 사회 계약이 탄생시킨 군주는 혁명으로 축출할 수 있다. 루소에게 사회계약은 앞의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인의 의지와 집단의 의지가 하나가 되는 장치의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버크는 사실상 이 모든 개념들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한다. 첫째, 사회질서가 존재해야 집단 정체성의 존재가 정당화되는데, 밑도 끝도 없이 은근슬쩍 집단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둘째, 혁명을 일으킬 권리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혁명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혁명권을 부여할 수 있는 사회질서는 없다. 셋째, 사회질서 자체보다 폭도의 일시적인 충동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버크에게는 자연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상태에 호소하면 무정부 상태가 초래되기 십상이다.
--- pp.299-300
버크가 보기에 영국 헌법의 진수(眞髓)는 (고전적인 공화정 이론, 몽테스키외,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잉글랜드에서 진행되어온 정치적 숙려[熟慮]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사회질서를 지배하는 큰 집단들, 즉 군주·귀족·평민의 이익이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는 점이다. 헌법은 균형 잡혀 있으므로 상황과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응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바로잡을 수단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세 가지 사항이 도출된다. 첫째, 특정 이익집단이 그 집단에 주어진 권한의 한계를 넘으려고 시도하면 저항에 부딪힌다. 여기서 사법부의 권한을 확장하는 데 버크가 반대한 근거를 볼 수 있다. 둘째, 헌법 자체는 급격하거나 과격한 변화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대대로 물려받은 사회질서의 지혜를 일부 파괴하고 자가 수정 역량도 훼손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개혁은 제한적이어야 하고 당대의 요구에 합당한 정도에 한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버크는 변화 자체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변화에만 반대한다. 오히려 버크는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주어진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사회질서 자체가 끊임없이 진화하게 된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에 담긴 말을 떠올려보면, “변화를 일으킬 수단이 없는 국가는 국가를 보존할 수단이 없는 셈이다”. 버크는 1688년 명예혁명을 비방하기는커녕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과 「소장 휘그당원들이 노장 휘그당원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에서 명예혁명을 헌법을 보존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이고 제한적인 변화라고 찬양하고 있다.
--- pp.304-305
따라서 버크는 당대에 소수의 이익과 다수의 이익의 균형을 맞추는 혼합형태의 헌법과 더불어 사회질서의 중심축으로서 귀족의 권한과 의무를 옹호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는 겉만 번드르르한 귀족이 아니라 실제로 덕망을 갖추고 업적을 쌓은 귀족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런 믿음이 엿보인다. ……그러나 사회질서는 권력자들의 덕망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 모든 계층의 습관과 행동 또는 ‘예의범절(manners)’로 유지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서로 모방한다.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고 경쟁한다. 사람들은 관행, 습관, 규율, 행동 양식을 만들고 이를 통해 서로 협력하고 경쟁할 수 있게 된다. 개인의 차원에서 바람직한 습관은 미덕으로 내면화된다. 집단의 차원에서 바람직한 습관은 제도를 탄생시키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자본, 즉 신뢰가 생긴다.
--- pp.308-309
바람직한 정치 지도자는 ‘개혁’에 집중해야 한다. 효과적인 개혁의 속성에 대한 버크의 발언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발견되지만 일곱 가지 핵심적인 특징들로 요약된다. 어떤 문제의 부작용이 확실히 감지되기 전에 그 문제가 등장하리라는 점을 초기에 예측해야 한다. 개혁의 강도는 처치해야 하는 악의 수준에 부합해야 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기존의 구조와 과거의 개혁을 토대로 시행해야 한다. 그래야 거기서 습득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다. 점진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를 행하는 주체와 변화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변화에 알맞게 조정할 수 있다. 합의를 토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 개혁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가 임기를 마치고 나서도 개혁이 지속될 수 있다.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 내내 합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냉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각 단계가 실용적이고 도달 가능해야 한다.
--- pp.341
그렇다면 이제 어떤 결론이 나올까? 버크의 개념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수많은 장점과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결점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기본적 속성을 폄하하거나 외면한다. 사회보다 개인이 우선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과 제도들을 깎아내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안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회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그리고 세대적 차원에서 이기심을 조장할 위험이 있다. 정치인과 관료들을 오만하게 만들고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도록 부추길 위험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 혁명을 부추겨 처참한 결과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 --- pp.373쪽
버크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신봉하는 최고의 사도로 추앙받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할 여지없이 권위를 옹호하는 인물로 매도당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게 퍼붓는 정치적으로 일관성 없다는 비난은 치졸하고 편협해 보인다. 역사를 보면 버크가 그처럼 행동하게 된 이유와 추세들이 금방 드러나고, 이처럼 완전히 상반되는 의견을 표명하게 만드는 엄청난 변화에 버크가 직면하고 있었으므로 버크가 지닌 심오한 사상과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버크의 영혼은 폭정에 저항했다. 그 폭정이 군림하는 군주의 형태로 나타나든, 부패한 왕실과 의회 체제로 나타나든, 존재하지도 않는 자유의 선동적인 구호를 입에서 쏟아내는 잔혹한 폭도와 사악한 패거리의 형태로 나타나든 상관없이 저항했다. 자유를 옹호하는 버크와 권위에 맞서는 버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는 한결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한결같이 바람직한 사회와 정부의 모습을 모색하며, 이를 위협하는 양쪽의 극단적인 세력들과 번갈아가며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