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이 유독 사나운 날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첫 배송은 옷가게였다. 중년 여성들을 상대로 옷을 파는 브랜드 대리점이었는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장이 있는 곳이었다. 손님에게는 어떻게 대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택배 기사인 나에게는 입 한 번 연 적이 없다. 물건이 옷 박스라 대개 지고 가야 할 크기인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 옆의 빈 공간을 향해 눈길만 한 번 쓰윽 주는 식이다. 그럼 거기다 내려놓고 가게 문을 나선다.
물론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내가 사장의 직원도 아니고, 대우는 머슴처럼 하니 아무리 천산산맥의 양 떼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코알라의 수면 부족을 걱정하고 있는 나라도 욱, 하고 화가 치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일에서 배운 게 있다면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는 거다.
돼지와 뒹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함께 더러워질 뿐이고, 심지어 돼지가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
--- pp.69-70
대가는 지불할 생각이에요. 한 번 만날 때마다 백만 원. 결정은 제 얘기를 듣고 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구미가 당겼다. 돈은 날로 먹을수록 좋으니까. 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피땀을 흘려서 번다? 피땀이 아깝다. 노동의 가치? 그런 건 브런치나 먹으며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지 않는 인간들이나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다. 되도록 날로 먹고 싶은데,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뿐이다. 안타깝게도 흙을 파먹고 사는 재주도 없고.
“그러니까 당신 얘기는, 커피나 마시면서 얘기나 들어주면 백만 원을 주겠다는 뜻입니까? 듣다가 심심하면 당신 모자나 들어주고?”
“모자는 들어줄 필요는 없지만, 맞아요.”
여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제 길거리에 돈을 뿌리는 건 심심해서 나한테 뿌리겠다는 말로 들렸다. 이런 걸 횡재라 한다. 그러니 당장 대답할 수밖에.
“거절하겠습니다.”
“왜죠?”
“공짜는 믿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은 탓이겠죠.”
--- pp.114-115
“형님도 처음 할 때 힘들었습니까?”
대답하지 않고 잠시 멈춘 후 담배를 물었다.
“내 경우에는 바닥을 두 번 느꼈어. ‘이러다가 죽겠다’가 바닥인 줄 알았는데 하나 더 있더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너도 다 큰 어른이니까 눈물 따위는 흘리지는 않을 거야.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몸이 울어. 정말이지 몸이 울어. 하지만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저 놈의 택배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걸 느낄 사이가 없다는 거야. 시간이 꽤 지나서 일에 익숙해지면 아, 그때 내 몸이 울고 있었구나 싶지. 그러니까 별로 걱정할 건 없어.”
듣고 있던 청림이가 오른손 검지를 세우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담배를 하나 건넸다. 한 모금 피우더니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쩐지 인생 같네요.”
청림이의 말에 담배를 비벼 끄며 내가 말했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간단한 인생은 없지 않을까?”
울음이 타는 강가에서--- pp.151-152
“어쩌면 한 사람이라도 기사님처럼 친절한 사람을 만났다면 좀 더 용기를 내서 버텼을지도 몰라요.”
씁쓸한 얼굴로 마스크가 말했다.
“남자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이 나라에서 여자로 사는 건 지뢰밭을 건너는 거예요. 남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걷거나 뛸 때 말이에요. 아무리 조심을 해도 몇 번씩 지뢰가 터지고 나아가 목숨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친절한 남자라도 쉽게 믿을 수가 없게 돼요.”
마스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된다는 뜻이에요?”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해될 리가 없죠. 밤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가고, 뒷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택시를 타도 기사들을 신경 쓰지 않고, 헤어진 남자친구의 성난 전화도 무서워해본 적 없고, 직장이나 모르는 남자의 성희롱을 견딘 적도 없고, 남자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기회를 힘들여 쟁취한 적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관습과 싸워 얻어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살아온 이의 공포나 괴로움을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전 누군가를 짐작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요.”
--- pp.179-180
“말귀를 좀 알아듣는 오빠일 거라 생각했는데 안 되겠네. 일단 가볍게 마사지 좀 받고 시작할래요? 김 군아!”
망치가 뒤로 빠지자 투피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나머지 떡대들 쪽을 보았다. 한 녀석이 앞으로 나왔다. 이 녀석이 김 군이었다. 궁금증은 풀렸다.
“김 군아, 이 오빠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마사지 좀 하고 시작하자.”
투피스의 말이 떨어지자 떡대가 나의 몸통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맞는 건지 해머로 맞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왜 그랬어요?”
고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투피스가 다시 물었다. 눈물이 핑 돌고 척추부터 머릿속까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그랬어요?”
투피스가 같은 말을 또 물었다.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쇼. 그러면 없는 사실도 다 말해줄 테니까.”
가까스로 힘을 짜내 투피스를 보며 말했다.
“뭐죠?”
투피스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어와 목적어.”
--- pp.25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