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병력이 있었으나 그가 건국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력이 아니라 그가 가진 인품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비주류인 신진사대부 세력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고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정도전의 가능성을 알아본 혜안과 정몽주를 끝까지 품고자 했던 포용력이 있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역성혁명으로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여 2인자가 되고 싶어 했고,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고려를 개혁하고 싶어 했다.
정도전은 훗날 자신을 한고조 유방의 책사였던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뜻대로 천하를 개혁하기 위해 자신이 이성계를 선택했다는 뜻이었다. 정도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이성계는 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과연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 「이성계, 고려의 2인자에서 조선의 건국 시조가 되다」 중에서
정도전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간악한 신하’로 묘사되었다. 정도전의 신원이 회복되어 공신 칭호를 돌려받은 것은 건국으로부터 500년이 지난 제26대 고종 때였다.
정도전에게 진정한 전성기가 찾아온 것은 최근 수십 년 사이다. 정도전의 이미지는 비운의 혁명가이자 시대의 천재로 탈바꿈되었고, 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가 제작되면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배지를 전전하던 비주류 지식인에서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왕조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 천재 혁명가 정도전. 그는 왜 자신이 설계한 나라 조선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은 실패한 정치가가 되었을까?
정도전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다. 실록은 승자의 기록이다. 『태조실록』은 이방원이 임금으로 즉위한 뒤 만들어졌고, 정도전을 비열하고 졸렬한 인물로 평한 이 기록에는 이방원의 시선이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정도전이 승리했다면 이방원이 과연 실록에 어떤 왕자로 기록되었을지 알 수 없다.
--- 「정도전, 성공한 혁명가와 실패한 정치가의 두 얼굴」 중에서
34세의 이방원은 정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았고 마침내 조선의 제3대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이방원이 임금이 되자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많은 공신들이 저마다 2인자를 자처했다. 공신들로 가득한 조정에서 이방원은 놀라운 정치력으로 왕권을 강화하였고, 오만함에 빠진 신하들을 충신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방원의 조정은 위험천만한 위기와 드라마틱한 반전이 난무했고, 충신과 반역자의 판단 기준은 오직 이방원에게만 있었다. 총성 없는 전쟁터 같은 이방원의 조정에서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섬김의 자세’를 갖춘 준비된 처세의 신, 하륜이었다.
--- 「이방원, 버림받은 왕자에서 조선의 창업 군주가 되다」 중에서
하륜은 태종과의 만남에 대하여 “위에는 마음을 극진히 하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마음을 극진히 하는 신하가 있다. 이같이 군신이 서로 만나기는 예로부터 어렵다”고 말했다. 하륜과 태종은 어려운 시절에 만나 의기투합하였고, 그 후 20년을 함께하며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태종이 즉위한 뒤 하륜은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는데 한 번도 신하로서 분수에 넘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능력을 갖추고도 군주에게 순종할 줄 아는 하륜은 태종이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신하였다.
물론 하륜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는 인사 청탁을 받기도 했고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다. 그래서 하륜은 ‘청백리’의 명예를 얻지는 못했다.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은 하륜에 대하여 각기 다르게 평하고 있는데, 『태종실록』의 기록이 극찬 일색인 것에 비하여 『세종실록』의 기록은 객관적이다. 상반된 두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평가는 하륜이 학문에 해박하고 재주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만약 하륜이 살아서 이 평가를 보았다면 단점이 드러난 것에 연연하기보다 장점이 기록된 것에 기뻐하지 않았을까. 하륜은 그런 사람이었다.
--- 「하륜, 탁월한 처세를 보여준 성공한 경세가」 중에서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은 수많은 관리들을 일시에 척살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만약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길을 선택했더라도 그는 영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기 위해 수양대군은 천륜을 거슬러야 했고 양심을 버렸다. 대신 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수양대군은 정난에 성공했고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것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뒤 수양대군이 지불해야 할 대가는 컸다. 세종과 문종처럼 성군이 되고 싶었던 수양대군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세종과 문종의 충신들은 반역자를 처단해 단종의 원수를 갚겠다며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고, 그때마다 수양대군은 그의 손으로 충신을 죽여 목숨과 왕위를 부지했다. 그 결과 수양대군의 곁에는 그에게 아부하여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신하들만 남았다.
충신이 없는 시대를 만든 수양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찬탈자’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수양대군의 즉위와 함께 권력의 핵심이 된 한명회는 그 후 자신의 두 딸을 제8대 예종과 제9대 성종의 왕비로 만들며 강력한 외척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 「수양대군, 왕위를 찬탈한 야심가」 중에서
집안이나 인맥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자수성가한 한명회의 인생은 드라마틱했다. 태어나서는 부모에게 외면당했고, 일찍 고아가 되어 가난에 시달렸으며, 38세까지 관운이 풀리지 않아 고생했다. 그러나 권력의 흐름을 읽는 눈만큼은 탁월하여 수양대군의 야망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의 욕망을 현실로 만들어줌으로써 권력을 거머쥐었고, 화려한 세도가의 길을 걸었다. 매우 독특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손에 넣은 한명회는 그 후에도 탁월한 권모술수를 발휘하며 수많은 정적들을 빈틈없이 제거하였고 최고의 권세가로 이름을 날렸다.
간신, 권신, 척신의 대명사인 한명회는 분명 훌륭하고 모범적인 정치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가이자 한 시대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한명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사용한 방법이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 그 시대가 좋았는지 좋지 않았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후대의 몫이다. 한명회를 닮은 혹은 닮고자 하는 정치가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한명회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역사는 한명회가 불가능해 보였던 성공과 출세를 이룬 방법은 물론, 영원불멸할 것 같았던 권력을 잃은 과정까지도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 「한명회, 척신정치의 원형을 만든 세도가」 중에서
중종반정의 성공 이후 임사홍은 조선 최악의 절대 간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른말을 고해도 공공의 적이었고, 유배지에서도 견제의 대상이었던 임사홍은 권력을 되찾자 살벌하게 복수를 진행했고, 기꺼이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길을 선택했다. 임사홍을 싫어했던 이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통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림들은 임사홍이 죽은 후에야 마음 놓고 말과 글로 그를 두 번, 세 번 거듭 난도질했다. 공신들은 이미 죽은 임사홍을 부관참시하고 가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임사홍은 부관참시되었고, 몰수된 재산은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나누어 가졌다.
중종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충신의 피가 끓는 고결한 선비들이 아니었다. 무능한 이들도 있었고 부정부패에 찌든 인물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임사홍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고, 공신으로 책봉되어 많은 특권을 누리기 시작했다. (중략)
반정공신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 다시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은 임사홍을 희대의 간신으로 묘사하여 실록에 기록했다. 임사홍은 간악한 간신의 대명사가 되었고, 사림은 억울한 피해자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비상식적일 정도로 악의가 충만한 임사홍에 대한 평가와 지나칠 정도로 미화된 사림의 충절은 오히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 「임사홍, 조선을 뒤흔든 절대 간신의 진짜 얼굴」 중에서
역사는 임사홍은 ‘간신’으로, 김안로는 ‘권신’으로 기록한다. 희대의 간신 ‘임사홍’의 악명에 비하면 김안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김안로는 임사홍보다 훨씬 엄청난 악습과 폐단을 남긴 인물이다. 임사홍과 연산군은 각각 간신과 폭군을 상징하는 인물로 두고두고 매도되었다. 임사홍과 연산군의 오명은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고 억울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김안로의 권력 남용과 악행은 훨씬 비난을 적게 받는 편이다. 그 원인은 김안로가 아닌, 오직 자신의 자리 지키기에만 연연하며 정치도 백성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중종에게 있다.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 것도, 김안로에게 권력을 준 것도 중종이었으나, 자신의 후궁과 자식들에게 사약을 내린 것도 중종이었다. 중종의 시대에 대장금과 조광조뿐 아니라 김안로라는 선비의 겉모습을 한 괴물 같은 권신 또한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 「김안로, 잔인한 숙청으로 권력을 장악한 권신」 중에서
율곡 이이는 이준경을 비난하며 절대 붕당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1575년(선조 8년) 이준경의 유언은 정확한 예언이 되었다. 조정은 동서 붕당으로 분열되었고, 이를 토대로 당쟁의 꽃이 활짝 피어났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붕당을 막으려던 율곡 이이는 동인의 공격을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때야 율곡 이이는 비로소 이준경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그를 비난했던 것을 크게 반성하였고, 당파 간의 화합을 위해 평생 노력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 「이준경, 혼군의 시대를 이끌며 당쟁을 예측한 명신」 중에서
아버지 송사련이 저지른 악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송익필. 그의 삶은 영광보다 고난이, 명예보다 비난이 가득했다. 송익필은 부친의 불명예를 학문으로 승화시켰고, 입신양명이 좌절되자 기꺼이 친구들의 그림자가 되었다. 배후에서 서인 세력의 책략가로 활약한 송익필은 당쟁의 역사를 만들었고, 스승을 하늘처럼 존경하는 제자들을 길러내어 산림의 종주가 되었다. 이는 송익필의 쟁쟁한 친구들이나 그와 대립각을 세웠던 동인의 인물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송익필의 행동이 모두 옳았다고 할 수 는 없다. 다만 송익필을 알면 가려졌던 조선의 한 부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 「송익필, 당쟁의 역사를 만든 산림의 종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