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발톱 세 개를 잃었다. 하지만 사하라는 내게 특별한 ‘선물’이었다. 사하라사막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설레었다. 완주의 성취감도 무척 컸다. 사막에서의 물 한 모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고, 내 몸의 한계도 알았다. 스핑크스와 쿠푸왕 피라미드의 웅장함에 넋을 잃었고,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빛도 잊을 수 없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새로운 사람과 세상을 만난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즐겁고 확실한 믿음을 얻었다. 사하라에서, 나는 나를 넘어섰다.
--- p.48
모래언덕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선글라스 속으로 모래가 들어오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고비사막의 바람은 아주 불규칙적으로 불었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아무도 없는 모래언덕. 강풍이 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모래폭풍 속으로 나는 홀로 들어가야 한다. 알 수 없는 블랙홀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한가득 몰려왔다.
--- p.60
세상에서 남북으로 가장 긴 나라. 흥겨운 라틴음악과 감미로운 포도주가 있는 나라. 혁명 전사 체 게바라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렸던 광활한 사막과 평원. 칠레의 아타카마사막으로 떠나기 전부터 낯선 곳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심장이 뛰었다. 지구상에 가장 건조한 땅. 칠레의 아타카마사막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곳이겠는가? 이 말로 안 되는 땅에서 역설적으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아타카마사막 마라톤 250km. 다시 심장이 요동친다. 사하라사막, 고비사막에 이어 나는 또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이번에는 남미로 날아갔다.
--- p.70
2003년 프랑스를 사이클로 횡단하는 ‘투르 드 프랑스’ 대회 15구간 경기에서 랜스 암스트롱(투르 드 프랑스 7연속 우승자. 금지 약물 복용 사실이 알려져 우승 자격 상실함)은 1위로 달리다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바로 뒤따라오던 독일의 얀 울리히(그는 이때까지 4년 연속 2위를 했다)는 잠시 멈추고 암스트롱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결국, 암스트롱은 61초 차이로 우승했다. 얀 울리히는 만년 2위 자리에 머물렀다. 암스트롱이 5년 연속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대신, 얀 울리히는 5년 연속 2위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언론과 사람들은 준우승자 얀 울리히에게 환호했다. 우승보다 값진 ‘위대한 멈춤’이라며 암스트롱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준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스포츠에선 모두 1등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1위보다 2위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내는 순간이 있다. 치열한 순위 경쟁을 하지만 때로 스포츠엔 이렇게 가슴 따뜻한 감동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 p.84
하늘은 맑고, 바다는 끝이 없다. 바다와 하늘, 보이는 건 딱 그것뿐이다. 풍경이 비현실적일 만큼 미니멀했다. 나는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제야 평정심이 돌아왔다. 하지만 몸이 문제였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멀미와 구토를 심하게 한 탓에 배와 다리에 힘이 없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40시간의 비행과 30시간의 뱃멀미. 사투의 70시간이었다. 마라톤은커녕 남극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남극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라 ‘원정’이었다.
--- p.91
북극의 추위는 가차 없다. 한마디로 인정이 없다. 영하 29도면 망설임 없이 그대로 영하 29도의 추위 값을 해댄다. 이걸 정직하다고 표현해도 되나? 하여튼 그냥 솔직하고 송곳 같다. 옷, 장갑, 신발, 마스크, 눈, 코, 입이 모두 얼었다. 더는 뛸 수 없다고 생각할 즈음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 시간 만에, 나는 맨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우승이었다. 고비사막에 이어 다시 한번 우승의 기쁨을 안았다.
--- p.121
히말라야를 달린다고? 나도 산이라면 제법 달리긴 했다. 한라산, 고비사막의 톈산산맥 줄기, 칠레 아타카마사막의 고원지대, 알프스산맥……. 하지만 히말라야는 차원이 다르다. 세계의 지붕이 아닌가. 산소가 부족할 텐데 내가 잘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동시에 들었다. 의구심은 이내 도전 의식으로 바뀌었다. 생각해보니, 아타카마사막 마라톤은 해발 4,000m에서 시작했다. 알프스산맥도 험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히말라야 레이스는 유명 언론이 앞다투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라톤’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가. 한 번 더, 생각하면 ‘히말라야 100마일 런’은 나와 참 잘 어울리는 대회였다. 사하라, 고비, 남극, 북극점……. 되돌아보면 나는 늘 도전했다. 가장 더운 곳, 가장 건조한 곳, 가장 추운 곳. ‘그래. 이번엔 가장 높은 곳, 히말라야로 가자.’
--- p.151
사막의 밤은 평화롭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별빛, 유난히 밝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들. 사막의 밤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름답다.
--- p.169
마지막 체크포인트를 지났다. 2,345km. 이제 몇 분 후면 한 달 넘게 달린 나의 도전이 끝난다. 내 몸은 더 가벼워졌고 발놀림은 더욱더 빨라졌다. 지난 한 달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뜨거운 태양, 소나기와 안개비, 내 마음을 위로해준 무지개, 물결치는 포도원과 옥수수밭, 고요한 침묵을 깨는 발걸음 소리, 햇빛이 비치는 날 나와 함께 했던 내 그림자, 내 마음마저 붉게 물들이던 저녁노을, 어둠 속을 달리던 순간의 짜릿함, 새벽 별을 바라보며 달리던 동트기 전의 공기, 나를 괴롭히던 모기떼와 하루살이, 목마르고 배고팠던 순간, 슬픔과 외로움의 기억, 고통과 걱정의 순간, 나를 배려해주고 응원해준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 달리면서 만난 모든 자연과 순간순간 느낀 감정들, 그리고 다정다감한 프랑스와 독일 사람들! 이 모든 게 나의 나침반이었다. 내가 달릴 수 있게 해준 가장 뜨거운 응원이었다. 끝이 보인다. 저 결승선을 통과하면 35일 동안의 달리기가 끝난다. 가슴이 벅차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 감정 덩어리가 올라온다.
--- p.205
새로운 꿈을 만들기로 했다. 지금까지 내가 세계의 울트라 트레일 러닝 대회를 찾아다녔다면, 이번에는 세계의 러너들이 내 고향 제주도로 찾아오게 만들자. 걷고 달리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내 고향 제주만의 독특한 매력을 전 세계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 p.206
새벽 5시, 잠에서 깨어 보니 아직 밖은 깜깜하다. 날이 밝으면 첫 레이스가 시작된다. 일주일의 레이스는 일상과 ‘이별하는 시간’이다. 여기는 파타고니아 국립공원의 인적이 드문 고원지대다. 인터넷과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일상의 음식과도 이별해야 한다. 편안하고 안락한 침대, 가족과 사회와도 잠시 안녕이다.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고 자연 속을 달리며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 p.258
트레일 러닝은 새로운 자연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자동차와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땅, 새로운 환경, 새로운 자연을 두 발로 걷고 달리며 느끼고 감상하고 경험하는 체험 여행이다. 동시에 트레일 러닝은 직접 달리며 한계에 도전하며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나를 위한 여행’이다. 나를 위한 행복한 여정, 궁극의 여행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 p.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