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예언자들은 우리 자신을 숭배하지 말고 저열한 인간적 감정인 탐욕 앞에 무릎 꿇지 말라고 끊임없이 외쳤다. 이들의 희망은 자기기만이 아니라 신성한 것들에 대한 존경에 근거했다. 예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타자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차원에 대한 존경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 p.6
각자 많이 벌어서 많이 사고 많이 소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땀 흘리며 몸을 움직여서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지지해주고 또 나 역시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든든한 안전망이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 p.49
우리 삶에서 정말로 필요한 변화는 당국의 정책 결정이나 입장 변화가 아니라 당국과 개인의 경계에서, 시민과 국가의 경계에서 권력을 불신하는 아나키스트의 본능을 가진 사람들의 저항을 통해 이루어진다. 당국은 거기에 밀려 마지못해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 p.83
겨울바람이 매섭게 차고, 눈보라가 쳐도 새는 차갑고 어두운 하늘을 낮게 난다. 그리고 그 새를 쫓는 고양이도 눈 위를, 얼음 위를 그 연하고 부드러운 발바닥으로 달린다. 수천수만 년 그랬듯이 사뿐사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한 채. 너무나 작고 연약하고 애절한, 가여운 존재들. 그러나 파괴되기에는 너무나 크고 복잡하고 노회하고 교활한 전체. 그 전체에 몸을 실어 산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 p.104~105
이러한 바울의 언어들은 바울이 현재의 시대를 악한 통치자들의 지배하에 있는 것으로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현재의 삶을 악한 지배권력 아래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악한 지배권력의 멸망, 세계의 전환을 기다리는 것은 유대 묵시문학의 기본 패턴을 되풀이하는 것이며, 이 점에서 바울의 종말론적 기대는 권력을 불신하는 유대 묵시문학 전통의 맥락 안에 있다. 바울은 권력의 복원이 아니라 권력의 멸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 p.121
바울의 수사에는 필로의 글이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빈정거림, 비꼼, 여유 같은 것이 없고, 오히려 긴박성과 당면한 사안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특정 상황으로부터 유래했을 모종의 긴박성이 바울로 하여금 그가 쓴 다른 편지들과도 모순되고, 그 자신의 신학과도 모순되는 수사를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 p.170
신명기계 역사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패망을 경험한 기원전 6세기에 그러한 파괴와 고통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멸망에 대한, 국가라는 형태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이상을 실험했던 것이 실패로 돌아간 데 대한 신학적 설명인 것이다.
--- p.177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강의 파괴. 이 모든 것이 인간 삶의 조건을 향상시킨다는 선전선동에 의해 고무된 것이다. 오늘날 커다란 비극은 항상 진보와 합리적 질서에 대한 낙관적 견해와 관련이 있고, 국가는 언제나 그러한 낙관적인 견해를 선전하면서 실은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적 삶과 자연을 파괴했다. 거기에는 좌파건 우파건, 진보건 보수건 차이가 없다.
--- p.192~193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당한 고난의 이야기다. 모든 전쟁과 정복의 역사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과 부상당한 사람들의 역사이며, 고문당하고 학대당하고 학살당한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의 역사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노예들의 피땀 위에 세워졌다면, 산업화시대의 진정한 역사는 공장과 광산과 건설 현장에서 착취당하고 고통당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의 역사일 것이다.
--- p.195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의 평균이라는 의미의 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의 수학 단위로 환원한 것이고 순전한 관념의 산물이다.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서 보면 인간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다. 따라서 산업사회가 전제하는 경제적 중성자로서의 인간은 기독교적 인간관에 대한 배반이다.
--- p.235
이들을 이집트의 사막으로 이끌었던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운동이 지금 세상을 위해 필요하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와 진정한 자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같지만, 우리 시대에 그러한 운동은 역설적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벌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사멸해가는 세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 p.251
오늘날 광야는 어디에 있는가? 실존적으로는 마음을 비운 상태이며, 사회적으로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곳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빈들을 열어놓아야 한다. 자신을 깨뜨릴 수 있는 곳, 삶을 정화시킬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 자기반성을 모르는 사람, 마음속에 빈들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사회적으로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곳이 광야이다. 그곳으로부터 이 사회를 정화하고 변혁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이 주어진다.
--- p.265~266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의 눈에는 폐허로 보였다면, 지난 수십 년 진실과 정의를 대가로 지불하고 우리가 걸쳤던 성장경제의 번쩍이는 옷은 실은 남루한 누더기에 불과했다. 이제는 피차의 남루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껍데기를 벗은 삶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두려움 없이 가난을 실천할 때다. 이제야말로 빈들에 서서 거친 모래바람을 맞으며 하느님과 함께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하는 회개가 되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 될 것이다.
--- p.268
빈들은 문명과 기술, 모든 인위적인 것이 없는 곳이다. 도시와 도시적 감수성을 무력화하면서 대자연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곳이다. 문명의 틀로 재단한 질서의 상징으로서 천상이나 하느님이 아니라, 광활한 대지의 생명력이 나의 혼을 뒤흔드는 곳이다. 그곳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 원초적 생명력이 숨쉬는 자리이며, 순수한 생명과 영의 바람, 자유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인간적인 노력과 몸부림이 그친 자리,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시작되는 자리,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는 자리이며, 하느님이 일을 시작하는 자리이다. 야곱이 하느님과 만나 씨름하고 삶을 새로 시작한 곳도 빈들이었다. 빈들은 하느님과 만나서 새로 시작하는 곳이다. 종교는 이 ‘빈들’로의 회귀를 통한 구원을 약속한다.
--- p.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