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 보니 사방 흰색 벽에 둘러싸인 병실이었다. 의사가 솔렌을 향해 뭔가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 가운데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처음에 솔렌은 의사가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다른 어느 환자의 일을 이야기하는 걸까? 그러다가 기억이 되살아 났다. (……) 몇 주간의 요양 생활 끝에 솔렌은 병실의 흰색 벽을 벗어나 정원을 한 바퀴 돌 정도로는 회복되었다. 벤치에 앉은 솔렌 곁으로 의사가 다가와 앉았다. 의사는 솔렌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아이를 칭찬해 주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이제 곧 퇴원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더라도 약은 꾸준히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도 솔렌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가 봤자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 요양원을 떠나기 두렵다고 솔렌은 의사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실업자 생활은 처음이거든요. 앞으로 출퇴근도 없고 회의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는 시간을 맞게 될 텐데 그런 경험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닻줄이 풀려 표류하는 꼴이 될까 봐 불안해요.” 그러자 의사가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무언가 타인을 위한 일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봉사 활동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이런 제안은 의외였다. 의사가 말을 이었다. 솔렌에게 닥친 증상은 말하자면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살아갈 이유, 일해야 할 이유, 그 모든 게 별안간 사라져서 그래요……. 그런데 그럴수록 자기 안에 갇혀서는 안 돼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해요. 아침에 눈을 뜬 뒤 기어이 몸을 일으켜 움직여야 할 이유를 되찾아야 해요. 자신이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필요해요.”
정신과 의사가 제시하는 처방이라는 것이 알약과 봉사 활동, 두 가지가 전부라고? 11년간 의학을 공부해서 내놓은 해결책이 고작 이거야? 솔렌은 당황했다. 봉사 활동에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은 마더 테레사 같은 희생과 봉사의 삶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지금 같은 상태의 자신이 누구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침대를 벗어나 한 걸음 떼어 놓기도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의사는 자신의 처방을 꽤 확신하는 눈치였다. “한번 해 봐요.” 그가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퇴원 허가를 내리고 서명했다.
--- p.12~21
사실 솔렌은 불행이라는 것을 직접 겪어 보지 못했다. 신문들이나 TV 르포 영상을 통해서는 간혹 만나 보았다. 하지만 그건 멀리서 구경하는, 바리케이드 뒤편 안전지대에서 관찰하는 불행이었다.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솔렌도 ‘취약 계층’이라는 용어에만 익숙했다. 미디어마다 걸핏하면 끌어들이는 말이다 보니 그것에 대해 뭔가 아는 느낌이지만 현실에서 취약 계층과 접해 본 적은 없다. 솔렌이 아는 가난이란 고작해야 동네 빵집 앞의 젊은 여자, 손을 내밀어 돈 몇 푼, 혹은 빵 조각을 구걸하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눈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깡통 하나를 앞에 놓고 그 자리에 죽치고 있었다. 솔렌은 매일 아침 길을 오가면서 여자를 보았다. 발을 멈춘 적은 없다. 경멸감이나 무관심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습관 탓이다. 그의 가난은 그림으로 치면 그저 배경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은 이 도시의 풍경을 구성하는 한 불변 요소, 으레 있기 마련인 무엇이었다. 멈춰 서서 동전 한 닢을 줘 봤자 그 여자는 내일도 주거 부정 상태일 게 아닌가. 그러니 그런 행동이 무슨 소용인가? 각자가 짊어질 책임은 공동체의 책임 속으로 섞여 들어가면 희석되고 만다. 그런 사실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목격자가 많을수록 증인으로 나서는 사람의 수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빈곤에 대한 태도로 마찬가지다. 솔렌은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일에 붙잡힌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 여자 앞을 그냥 스쳐 지나갔고 뒤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각자 자신의 일을 챙기고 나머지 일은 신이 알아서 하게 맡기자는 주의였다. 물론 그러자면 신이 있어야겠지만.
--- p.55~57
“필요한 곳에 자신의 시간을 내준다는 생각이야 좋았죠. 하지만 그건 어쨌거나 상대방이 받을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솔렌은 칼로 물 베기를 하다가 온 기분이라고, 자신은 공연한 헛수고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 경험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고, 궁전인지 어딘지에 다시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더 이야기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전화선 저편에서 레오나르는 차분히 듣고 있었다. 그는 솔렌의 실망감을 이해했다. 그 자신도 처음 자원봉사로 어느 구청에서 대필 작가 일을 시작했을 때 동일한 좌절감을 맛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솔렌도 너무 빨리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여성 궁전 거주자들은 배타적이고 경계심이 많아요. 그럴수록 도전해 볼 가치가 있잖아요! 그들의 신뢰를 얻어야 해요. 마음을 열도록 해야죠. 시간이 걸리겠지만, 당신은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솔렌에게 한 번만 더 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여성 궁전에 한 번 더 기회를 주라는 부탁이었다.
레오나르의 이야기는 솔렌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을 부채질했다. 솔렌은 대답했다. 여성 궁전으로 다시 가서 그곳 거주자들 앞에 무릎을 꿇을 생각은 없다고, 자신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유감이지만 이번 일은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며, 이것으로 대필 작가 일은 끝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고 나서 솔렌은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든 솔렌을 설득하려고 애쓸 게 뻔한 레오나르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레오나르의 낙천성은 솔렌의 화를 돋우기만 할 뿐이었다.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식의 열정, 모든 게 잘될 거라는 사고방식이라니, 얼마나 순진한가!
‘천만에, 모든 게 잘 된다는 법은 없어. 세상일이 순리대로 풀릴 거라는 건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이지. 여성 궁전의 그 사람들은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야. 돈, 정붙일 가족과 친구, 사회 내의 연줄, 학력, 어느 것 하나 갖지 못한 그들에 비하면 나는 다 가진 사람에 속해.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잔고가 두둑한 통장 세 개가 있어. 하지만 나는 생의 어느 때보다 불행하잖아. 솔직히 말해 아침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의욕도 없어. 그러니 아냐, 정말로,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말은 헛소리야. 세상일은 그야말로 거지 같아. 그게 진실이야.’
--- p.80~82
그 순간 한 젊은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로 들어왔다. 서른 살가량 된,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솔렌이 여성 궁전을 처음 방문했던 날, 그 여자는 원장을 쫓아와 불만을 쏟아냈다. 그는 오늘도 화가 난 것 같았다. 모여 앉아 차를 마시는 여자들에게로 달려가더니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정말 열 받게 만드네. 이봐요, 깜씨 아줌마들! 3층 주방 플레이트는 댁들이 아예 세냈어? 온종일 냄비를 올려놓으면 다른 사람은 언제 쓰라는 거야? 여기가 자기네 집인 줄 알아? 아줌마들이 자정까지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아주 지긋지긋해. 그 시간에 자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들어먹어. 귓구멍들이 다 막혔나? 그리고 복도에서 쇼핑 카트 좀 끌고 다니지 말라고. 끌고 다니다가 한 번만 더 걸리면 내가 쇼핑 카트를 훔쳐다가 이베이에 팔아버릴 테니까. 몇 푼이야 쳐주겠지!”
뜨개바늘을 분주히 놀리던 여자가 잠시 눈을 들어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반면에 구석에 배낭들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잠들었던 여자는 소스라쳐 잠을 깬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조용히 해.” 잠을 깬 여자가 짜증을 냈다. 젊은 여자는 즉각 맞받아쳤다. “왜 여기서 잠을 자느라고 난리야? 여긴 공동 구역이라고. 방도 침대도 있는데 왜 여기 내려와서 자냐고. 벤치 위에서 자고 싶으면 다시 길바닥으로 나가면 될 거 아냐. 그러면 정말 잠잘 데가 필요한 사람한테 방을 내줄 수 있잖아!” 배낭을 끌어안은 여자가 발끈했다. “네가 길바닥 생활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길에서 뒹굴어 본 적도 없으면서!” 여자가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길바닥 구경도 못한 네 엉덩짝이나 잘 간수해. 온갖 군데 뭉개고 다닌 내 엉덩짝에 너 따위가 맞장 뜨려고? 어디 한번 대 봐? 너는 강간을 몇 번 당해봤어?”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차를 마시던 여자들도 덩달아 역성을 들고 나섰다. 모두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군가가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채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솔렌은 손을 노트북 자판 위에 올려놓은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에 얼이 나갔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크베타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장면에 익숙한 것 같았다. “처음에 화를 내면서 들어온 저 여자는 생티아인데, 온종일 화를 내는 게 일이라우.” 안내 데스크 직원이 달려와 싸움을 말렸다. 직원은 생티아에게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더 큰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한 달간 방문객 금지라는 징계를 받은 상태가 아니냐고 하면서. 생티아는 주위에 둘러선 ‘깜씨 아줌마들’에게 욕을 한마디 더 퍼붓고 배낭 바리케이드 뒤편의 여자를 향해서도 마지막 욕설을 날린 뒤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 p.115~117
라 르네는 세 개의 삶을 겪었다고 했다. 고난이 시작되기 이전, 그 첫 번째 삶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다음이 길바닥에서 마주친 삶이었다. 두 번째 삶은 라 르네를 삼켰고, 이전의 삶도 지워 버렸다. 라 르네는 잔인한 그 시간들을 궁핍, 추위, 무관심, 폭력으로 요약했다. “길바닥에 내몰리는 순간 모든 걸 빼앗겨. 돈, 신분증, 휴대폰, 속옷까지 탈탈 털린다고. 나는 금니까지 뽑혔어. 강간도 당했지. 쉰 네번.” 라 르네는 횟수도 기억했다. “쉰 네 번 당했어. 다 망가진, 숨만 붙은 이 몸뚱이가 쉰 네번 짓밟혔어.” 믿고 싶지 않지만 각 병원 진료 기록들이 현실을 증명했다. 미디어들이 여자 노숙인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조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건 바깥으로 드러낼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저녁 뉴스에서 다루기에는, 가족들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는 시각에 방송으로 내보내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자러 들어갈 시각에 자기 집 대문 밖에서, 동네 거리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편을 택한다.
“잠을 자는 게 소원이었어.” 라 르네는 말했다. 잠은 하나의 사치였다고 했다. 여자 노숙인들은 그런 사치를 부릴 수 없었다. 가난은 고통을 무한대로 새끼치기했다. 라 르네는 한밤중에 주차장 구석에 숨어 잠들었을 때 누군가 발로 차는 바람에 깬 적이 있다고 했다. 이어서 헐떡거리는 남자 숨소리가 몸 위로 덮쳐 왔다. 술 취한 남자 노숙인 무리였다. 그날 밤 그 무리가 자신에게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 “기억하는 것조차 빌어먹을 짓이야.” 지우고 싶은 수많은 기억 중의 하나였다. “잠이 들면 일단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해.” 라 르네는 노숙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잠이 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잠들지 않으려면 걸어야 했다.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걸었지. 하룻밤에 수십 킬로미터를 걸었어. 내가 걸은 거리를 모두 합하면 파리에서 뉴욕까지는 될걸. 이따금 밤중에 두 다리가 몸뚱이에서 당장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픈 날이 있었지. 그래도 걸어야 했어. 멈춰 서면 안 되니까.” 매일밤 라 르네는 끝없는 나선계단에 다시 올라섰다. 그렇게 목적지 없는 여행을 시작했다. 떠나기만 할 뿐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는 여행이었다. 몸을 덮치려는 자들을 피하려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여성의 표식은 전부 숨겼다. “길에서는 그래야 해. 여자라는 걸 내보이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어.” 여자 노숙인들은 스스로를 지워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사회에서 사라진다. 지옥의 무한 회로, 고통의 악순환이다. 인간의 세계를 배회하는 유령들이다.
--- p.267~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