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섬은 생기를 얻었다. 겨우내 몸집을 불린 거북손은 속이 꽉 차게 살이 올랐고, 돌김도 부스스 제법 숱이 많아졌다. 낚싯배를 몰고 바다로 나갔던 노인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파도가 세드라고. 허탕을 몇 번 해야 봄이 오는 거시제.”
--- p.19, 「머나먼 야생의 섬 _맹골도」 중에서
청산도항은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삼치와 고등어 파시가 열려 여름철이면 수십 척의 어선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던 곳이다. 안통길로 불리는 청산도항의 뒷골목은 그 시절의 생활 문화를 재현하고 기록해두고 있다. 골목 벽면에 붙어있는 1937년 동아일보 기사가 눈길을 끈다. ‘청산도 근해안 고등어, 삼치 내습’.
--- p.36, 「우리나라 대표 청산려수 섬 _청산도」 중에서
결국 등대를 조금 벗어난 풀밭 위에 작은 공간을 찾아내어 재빨리 텐트를 쳤다. 비가 그쳤다. 축축함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활동이 자유로우니 살 것 같았다. 이윽고 등대가 기지개를 켜고 고결한 빛의 향연을 시작했다. 어둠이 깊어 갈수록 빛의 위엄은 커졌고, 섬과 바다는 마치 거룩한 종교의식을 치르는 듯 집중하며 경배했다. 꽤 많은 섬에서 등대를 만나보았지만 이렇게 바로 옆에서 그 불빛을 지켜보기는 처음이었다. 어찌 보면 오늘 하루의 고단한 여정이 비로소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았다.
--- p.67, 「마지막은 아니겠지요 _말도」 중에서
노화동은 서북방의 거친 바다와 싸우고 또 어우러져 지내온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살아가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다. 붉은 지붕은 지자체에서 도색 작업을 할 때 마을별로 색을 정했던 결과다. 마을의 가옥과 담벼락에는 모진 세월이 만들어놓은 생채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낡으면 낡은 대로 부서지면 부서진 대로 버텨야 하는 것이 섬의 생리다. 그만큼 물자의 수급이 어렵고 수선한다 한들 소금기 가득한 해풍과 위력을 가늠할 수 없는 태풍이 가만 놔두질 않을 테니 말이다.
--- p.73, 「반전의 묘미를 항해하는 섬 _소청도」 중에서
대야도는 여행자들이 흔하게 찾는 섬이 아니다. 찾아가는 길도 멀고 또 즐길거리나 먹거리가 풍부하지는 않다. 그래도 이장님은 사람들이 대야도에 많이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가롭게 해수욕도 하고 얼마나 좋아? 시끄럽지 않아야 편하게 쉴 수 있는 거 아니것어? 필요하믄 마을회관도 빌려줄 수 있는디.” 이장님의 소박한 섬 자랑, 찾아준 우리가 고맙고 또 인연이라 했다. 섬에는 인연들이 있다. 변하지 않는 심성을 가진 고운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섬으로 가는 길이 언제나 즐거운 것인지 모르겠다.
--- p.105, 「찾아가니 인연이 되는 섬 _대야도」 중에서
2020년 초, 고흥과 여수 사이의 4개 다리가 개통되면서 적금도, 낭도, 둔병도, 조발도 는 양방향에서 차량으로 올 갈 수 있는 섬이 되었다. 섬에 다리가 놓이면 많은 것이 달 라지게 마련이다. 우리 알고 있던 섬을 기억하는 일, 누구의 몫일까
--- p.172, 「다리가 놓인 섬 _여수 편」 중에서
밤을 잊은 고깃배들이 큰 바다로 나서고 구름은 달빛을 가르며 유유히 흘렀다. 사각사각한 바람이 볼살을 스칠 때마다 소주병은 조금씩 비워졌고, 경이로운 밤 풍경은 좋은 안주가 되었다. 침낭을 펼쳐놓고도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한 것은 순간의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 p.190, 「다도해의 최남단, 가을 섬의 끝판왕 _거문도」 중에서
일반적인 등대들이 직원 숙소나 관리소와 같은 부지에 세워진 것과 달리, 어청도 등대는 별도의 공간에 우뚝 서 있다. 빨간 지붕과 아치형 미닫이 문을 가진 등대는 이국적인 자태만으로도 매우 아름답지만, 절벽 끝으로 이어진 낮은 돌담길과 등대만을 위해 조성된 반원 터와의 어울림은 비할 데 없이 절묘하다. 이는 우리나라 등대 15경 중에서도 어청도 등대를 으뜸으로 치고 싶은 까닭이다.
--- p.216, 「으뜸 등대를 가진 천혜의 피항지 _어청도」 중에서
오후가 되어 해변 양쪽으로 물이 완전히 빠지자 작은 바닷가 갯돌들이 파래 옷을 뒤집어쓴 채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섬 주민들이 광주리를 옆에 낀 채 하나둘 해변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다 주민들 곁으로 다가갔다. “뭐 잡으시는 거예요?” “골뱅이도 잡고, 보말도 잡고.”??
--- p.224~225, 「공룡이 노닐던 칠천만 년 전의 섬 _사도」 중에서
겨울 울릉도는 제때 들어와 계획대로 여정을 마치고 나가기가 어렵다. 여객선에 올라 좌석 등받이를 뒤로 제치고 몸을 기대 묻으니 울릉도에서의 순간순간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섬, 바다, 구름, 바람, 별 그리고 내가 걸었던 길과 사람들. 그 질퍽한 감회의 끝자락에 순백의 나리분지가 펼쳐졌다.
--- p.280, 「나리분지의 길고 긴 겨울, 그 복판에 서다 _울릉도」 중에서
문어찜과 간장게장, 그리고 양념 우럭구이는 마주하는 순간부터 너무 기대되었다. 이윽고 술잔이 채워지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준비된 것이 없어서 대충 차렸어요”라는 인사말은 젓가락을 드는 순간 이미 무색해졌다. 현지 식재료 고유의 맛과 식감을 솜씨로 살려낸 최고의 밥상이었다.
--- p.288, 「꿈꾸는 섬 미술관 _연홍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