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식민지화되고 있던 한국에서는 자국의 유학사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행해져, 조선왕조의 체제교학體制敎學(국가의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유학자가 망국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간주되었다.
--- p.19
조선 유학사의 주자학 편향성이 비판받는 한편, 주자학에 대항하거나 이로부터 벗어나려 한 인물이나 학파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것이 식민지시대 한국 학계의 동향이었다.
--- p.24
17세기는 조선 유학사에서 사상사적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일컬어지는 시대이다. 반복되는 외세의 침입에 허덕였던 이 고난의 시대에, 경서 해석에서 주자학적 해석과 다른 학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 학계에서는 이 고난의 시대와 새로운 경서 해석의 출현이 인과관계에 놓여 있다고 …… 서술하였다.
--- p.28~29
식민사관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주자학에 도전한 인물이나 저작이 과도하게 주목받은 반면, 조선에서 가장 융성했던 주자학 방면에 대한 고찰이나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자학 측과 반주자학 측의 대립 도식에 갇혀, 평생 주자학을 연구했던 조선 유학자의 본질을 구명하는 데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 p.39
대부분의 사대부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걸고 올바른 도를 실현하려 하였다. 올바른 도의 실현을 자신의 의무로 인식하고 행동하였던 유학자들이 형성한 조선 유학사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형성된 유학사와는 다를 것이다. 유학사 연구에서도 이러한 유학자들의 존재 양상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 p.62
조선과 도쿠가와 일본에서 유학이 전개된 배경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전혀 다른 이 두 종류의 ‘주자학 연구’와 ‘주자학 비판’은 식민과 반식민항쟁의 권력구조에 의해 무리하게 연계되어 단순한 비교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타당치 못한 문화 비교가 조선 유학사 연구에 타당한 관점이 마련되기 어려운 환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 p.92
식민지시대에 본격화된 만큼 조선 유학사 연구는 망국을 초래한 원인을 구명하려는 깊은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실용을 경시하는 유가儒家 사회의 경향이 비판받는 동시에, 17세기에 실용과 실천을 중시한 인물이 발굴되어 칭송받아 왔다.
--- p.97
주희 주석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여 물의를 빚은 끝에 처벌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윤휴와 박세당을 들 수 있다. …… 1. 그들은 주자학에 이견을 제창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문난적’이라고 공격당한 끝에 처벌되었다. 2. 그들은 주자학을 비판할 의도로 새로운 경서 해석을 저술하였다. 3. 그들의 해석은 대다수 주자학자의 그것과는 대조적이며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로부터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식으로써 새로운 경서 해석을 집필하여, 엄격한 사상 통제의 억압 속에서 주자학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적 의식의 맹아가 발견된다’라는 사상사적 전환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p.127~128
17세기 조선 유학계에서 어떤 이는 주희의 발언을 실마리로 삼아 연역하고 어떤 이는 주희의 문언을 그대로 인용하여 자기 생각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주희가 읽은 서적들을 구해서 공부하고 주희의 저작을 분석·정리하면서 주희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과제를 설정·수행하였다. 주희의 견해에 동의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희와 다른 견해를 갖는 이라 할지라도, 주희의 학설에 의거하고 주희의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설을 전개하였다. 이처럼17세기 조선 유학사는 ‘주자학에 대한 정밀한 연구와 이에 동반하는 주자학 교조화’와 ‘주자학에 대한 회의 및 비판의식의 시작’이라는 두 개의 대립적인 축을 넘어선 지평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 p.179
조선조 경서 해석의 의의는, 그 표현에 지나치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주희 주석이라는 출발점에서 어떻게 나아갔는지를 포함하여 그 내용을 상세히 분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 p.194
17세기 경학에서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빈번하게 나타나 이 경향이 조선 후기에 유행할 정도로 선명해진 ‘사실’을 확인한다. 이러한 사상사에서의 ‘사실’에 ‘선’을 그으면 “17세기 이후의 실천 중시 경향이 실학사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라는 사상사상思想史像을 그려 낼 수 있을 것이다. …… 조선 실학 연구의 지향점은 조선 유학사에서 정주학과 구별되는 ‘실심實心’에 따랐던 사상적 전통을 발굴한다는 작업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실학의 기반이 된 사상이 정주학 이외에 존재한다”라는 전제가 미리 상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17세기박세당의 ‘실천적 경서 해석’이 조선조에서 ‘사상적 진보’를 나타내는 가치 있는 ‘점’으로 평가받아, 18·19세기의 ‘실학’으로 그 ‘선’이 이어진 것이다.
--- p.258
식민지시대가 되자 앞에서 서술했듯이 일본 학계에서 이토 진사이·오규 소라이가 ‘경전과 주자학의 권위에 과감히 도전하였다’고 높은 평가를 받은 한편, 조선조 유학자들은 도쿠가와 일본의 유학자들의 이러한 혁신 성과에 대비되어 ‘주자학의 추종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 그리고 머지않아 조선조 17세기의 일부 유학자가 주자학의 경서 해석에 대해 부분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에 주목하여, ‘근대의식의 맹아’라는 위상을 부여하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 이러한 연구를 전형으로 삼아 17세기 조선의 경학사는 ‘주자학 그 자체의 내재적 전개’로서가 아닌,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식의 형성’이라는 도쿠가와 유학 연구에서 유래된 관점으로 다시 읽히게 되었다.
--- p.281~282
이 책은 17세기 조선 유학사에 대한 통설을 재검토하여 이 문제에 답하고자 하였다. 통설에 의하면, 17세기 조선은 네 차례에 달하는 일본과 중국의 침입을 받고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 속에서 사상사적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통설에서는 주자학적 해석과 다른 새로운 경서 해석의 등장에 대해, 기존 주자학 사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튼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해석의 저자들이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상황이 기록된 사료에 대해서는 주자학파와 반주자학파의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의미 부여에 대해 ……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 p.307
식민지 한국에서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편향이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조선 유학사 최대의 특징 자체가 비판받은 것이다. 조선 유학사에 대한 이 같은 전면적인 부정 속에서,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한 주자학적 사상과 대립하면서 반주자학적 사상이 등장했다는 도식이 세워졌다. 17세기 반주자학적 경향의 등장은 이른바 ‘조선 후기의 실학파’ 탄생의 맹아로 주목받게 되었다.
--- p.308
조선 유학사는 올바른 도의 실현을 자신의 책무로 여기고 언제든 이를 위해 행동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만주족인 청을 대신하여 중화 도통의 계승을 자임하였고, 계승해야 할 도의 중심으로 생각하였던 것은 다름 아닌 주자학이었다. 경서와 세상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주자학을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이로부터 새로운 견해도 생겨났다. 그러므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저자들이 주자학에 대한 회의나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는 당연히 발견되지 않는다.
--- p.308~309
발전 배경이 전혀 다른 조선 유학과 도쿠가와 일본 유학의 ‘주자학 연구’와 ‘주자학 비판’은, 20세기 초반 식민과 반식민 항쟁이라는 권력구조에 의해 무리하게 연결되어 단순한 비교 대상이 되었다. 적절하지 못한 문화 비교는 조선 유학사 연구에서 타당한 관점이 마련되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p.309
17세기 당시, 주희의 학설과 다른 견해는 정치적 대립자에 의해 ‘주자와 다름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공격받았다. 권위 있는 주자학에 대해 이처럼 ‘다름’을 추구한 저작은 20세기 초반 이래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기존 권위에 도전하고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근대적 의식’이 여기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사료들을 상세히 읽어 보면, 주자학 연구가 매우 정밀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주희의 저작 속의 변화나 모순을 발견해 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17세기 조선 유학사의 양상이다.
---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