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조예은 저
21세기북스 출판사의 김광현 저자님의 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를 읽고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김광현 저자님의 글입니다. 평소 건축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는 독자이지만 ^^; 그래도 왠지 흥미가 가는 제목에 읽게 되었습니다. 해당 도서를 읽으며 단순 건축에 대한 지식적 설명이 아닌 철학적인 생각과 함께 건축에 대한 접근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한번쯤 읽기 좋은 도서라고 생각합니다.
강의를 옮겨놓은 책이었기 때문인지 배움이 많았기에 옮겨둔다.
- 집은 외적으로부터 생활을 지키는 그릇이다.
- 근대 건축은 흰색을 가장 우월한 색채로 보았다. 언제 봐도 새 건물처럼 보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르코르뷔지에의 사보아 주택은 사람이 살지 않는데도 언제나 새하얗다.
- 우리나라 건축법은 대지 하나에 건물 하나를 규제하는 법이다.
- 건축은 건축주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수단이다.
-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사람을 만든다는 윈스턴 처칠의 말에서 처칠은 building이라고 했지 architecture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우리는 국회의사당에서 토론하는 의원이지 사람을 뜻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말이 멋있어서 사람들이 인용하는 것은 건축이 사람의 삶을 만든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 근대 이전에는 절대 군주가 지었을지라도 새 건축물은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그 시대의 인간들은 그 시대의 건축과 하나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오늘날 대부분의 집은 단지 두사람의 마음에만 든다. 건축주와 건축가.
- 자크 라캉은 '사람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을 남겼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 한다. 욕망이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이 나의 욕망이 된다.
- 마사이족은 오래 정든 땅을 떠나 이주하더라도 새 땅에 고향의 언덕과 강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켈트족은 조상이 있는 고향의 이름을 따 가족의 이름을 지었다.
- 프라이버시란 권리가 아니라 격리다. 오늘날 우리의 아파트도 가정의 프라이버시를 중심으로 격리된다. 심지어 집안에서도 다시 프라이버시를 얻으려 저마다 밀실을 갖는다. 도어록이 붙은 아파트 철문은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마지막 방어선이 되어버렸다.
- 테마파크나 쇼핑몰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도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이를테면 '만화 카페'는 균질한 풍경 속에 있는 '다른 공간'이다.
- 1977년 도입된 선분양 제도로 건설 회사가 제품 경쟁력보다 원가 절감, 이윤 극대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30년 정도 지나면 안전을 위협할 만큼 내구성이 약해진다. 30~40년이 지나면 가치도 점차 0에 가까워진다. 한 세대가 지나면 주택도 없어진다는 말이다.
- 공간으로 기쁨을 주는 건축이야말로 소비되지 않는 건축의 첫번째 조건이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세계의 토착 건축은 용이나 강을 중시하되 미를 우선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 중심에는 늘 '기쁨'이 있었다. '기쁨'은 공동체의 지표이며, 건축가와 사람들, 공동체 또는 사회를 잇는다.
건축학 박사 김광현 교수의 책이다. 저자는 건축을 “공동체에 질서를 주기 위해 짓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저자에 의하면 건축은 태생적으로 배제하는 것(이기적인 것)이다. 건축은 우월함을 자랑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다. 사회적 산물이라던 건축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 되고, 건축주는 권력자가 되어 자칫 그릇된 생각과 욕망의 산물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욕망은 실재적 대상의 결여, 결여한 뭔가를 메우려는 충동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실재를 생산하는 것이라 말한다.(50 페이지) 건축은 정주(定住) 사회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곳에 정주하지 않고 소나 양이 물과 목초를 찾아 이동하며 살 듯 여러 장소를 옮겨가며 살게 되었다. 한정된 커뮤니티에 귀속되던 정체성, 지역성에 근거한 공동체의 감각은 크게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앞서가는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원하고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의 필요를 낳는다고 말한다. 건축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한 욕망을 형상화한다, 닫힌 구조로 내향적이 되는 것은 건축의 숙명이다.(65, 66 페이지) 도시는 교통하는 정주이자 불완전한 정주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한 말을 들려준다. “사람들이 살 집이 되는 인간의 공작물이 없다면 인간사는 유목민의 방랑과 똑같이 부초와 같은 공허하고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유목민에게 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머물 집이 없는 이동은 방랑이 된다는 의미다. 정주 사회는 땅을 기반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곳이다. 이웃 관계도 땅에 귀속된다.(73 페이지)
도시는 땅 위에 정주하는 동시에 특정 지역에 귀속하지 않고 사람들과 재화가 횡단, 교차하는 곳이다. 도시는 탈공동체적인 정주 사회다, 물질, 정보도 특정 장(場)에 집약될 때 다수의 신체, 재화, 정보가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꾸준히 이동할 수 있다. 신체, 재화, 정보 교환은 일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건축물이다.
막스 베버는 농촌사회에서는 땅이 중요하지만 도시에서는 집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이동하고 교환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 중계점에 건축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74 페이지) 근대 건축이 근대 도시를 만든 것도 아니며 근대 도시 때문에 근대 사회가 성립된 것도 아니다. 사회가 변화하고 이에 따라 도시가 변화했다. 근대 사회가 시작되고 한 세기가 지난 20세기 초 도시의 악화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근대 건축이 나타났다.(102 페이지)
건축하는 사람은 공간을 어떻게 만들까에 관심을 기울인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재현, 재현의 공간, 공간의 실천이라는 삼중 개념을 제시했다. 세 가지라 하지 않고 삼중이라고 한 것은 그 셋이 서로 변증법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110 페이지) 공간의 재현은 도시 계획가, 기술 관료 등 계획자가 주체가 되어 도면이나 모형으로 공간을 편성해 파악하고 계획한 공간을 말한다.
재현의 공간은 주민이나 사용자가 실제로 살고 사용하면서 시간이 흘러 숙성되는 공간이다. 상황 구축이나 축제 또는 혁명처럼 규범화된 공간 재현과 충돌하는 공간의 실천이 이뤄진다. 공간의 실천이란 어떤 공간이 나타나 유지되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는 사람 수명보다 오래 견디는 무수한 건축물에 둘러싸여 산다. 건축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135 페이지)
노예는 노동만 한다. 그러나 공작인은 작업을 한다.(140 페이지) 산업 혁명 이후 기계가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평등은 균일을 만들고 균일은 모방을, 모방은 대중을 만들었다. 대중 사회는 결국 소비 사회와 같은 말이다.(150 페이지) 현대 사회는 정보 조작으로 수요를 무한히 창출하는 소비화, 정보화 사회다.(152, 153 페이지) 권력은 건축으로 애국 이미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공간 구조물로 사회적 관계를 분류하기도 한다.
지금도 구조물은 차별적인 사회를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의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는 서던 스테이트 파크웨이의 다리들을 2.6미터 높이로 낮춰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가 설계한 존스 비치 공원에 소수 인종이나 저소득층이 들어갈 수 없도록, 가난한 이들이 탄 버스가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155 페이지)
권력은 저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다. 고대에는 한 사람이 지배했으나 오늘날에는 크고 작은 사회가 많은 사람을 지배한다. 플라톤은 알고 있으나 활동하지 않는 사람과 활동은 하지만 모르는 사람을 처음으로 구별했다. 플라톤식의 지식과 행위 분리는 모든 지배 이론의 뿌리가 되었다.(158 페이지) 기술이 계속 진보하고 이에 따라 기능도 계속 달라지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고안한 것이 균질 공간이다.(179 페이지)
균질 공간에서는 사용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균질 공간은 화폐 같은 공간이며 모든 기능과 용도에 대응하려는 자본주의의 공간 원리였다. 르페브르는 기능과 형태가 다른 공간을 이역(異域) 즉 헤테로토피아라 불렀다.(185 페이지) 정신병원, 감옥 등의 격리 시설, 홍등가, 묘지, 박물관, 도서관, 영화관, 전원 입사체 기숙사, 양로원, 병사(兵舍), 피난소, 유대인 거주 지구나 흑인 거주 지구 등이 근대의 헤테로토피아다.
양로원의 경우 노동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지내는 공간이기에 헤테로토피아다. 근대 사회는 노동력이 발휘되어야 기능하는 사회다. 저자는 아파트가 획일적인 이유를 분양받을 대상을 정하지 않은 채 생산하기 때문이라 말한다.(234 페이지)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용(用), 강(强), 미(美)라고 표현했다. 유용해야 하고, 내구력이 있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의미다.(285 페이지)
인류는 수렵 시대에 지모신을 섬겼으나 청동기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지모신에게는 공물을 바쳤으나 태양에게는 의미가 없어 하늘을 향해 기둥을 세웠다. 높고 질 좋은 나무를 고르고, 아주 멀리서 큰 돌을 가져왔다. 기둥을 여러 개 세움으로써 가을에는 낮이 짧아져 어둠으로 들어가고 봄이 되면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태양의 움직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기둥을 세우기는 힘들었지만 함께 세운 기둥에는 공동체의 염원과 기쁨이 차고 넘쳤다.(288 페이지)
땅을 딛고 빛을 받아 빛나는 수직 기둥은 땅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모두의 바람을 담아 땅에 누운 돌을 일으켜 세우니 돌은 그야말로 존재감을 뽐내는 큰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놓인 땅과 하늘과 자연이 이미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은 눈에만 아름다운 것을 넘어 공동체 사회 모두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뭔가를 구축함으로써 모두의 큰 기쁨과 진정한 아름다움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자는 건축은 나무처럼 자란다고 말한다. 건축은 우리 몸처럼 키우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295 페이지)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한 번 쳐다보고 마는 물체가 아니다.(296 페이지)
건축주는 건축가든 사용자든 건축물이 잘 자라 미래로 잘 전해지도록 공감과 공유의 기억이 풍성한 공간을 만들 책임이 있다. 저자는 건축이 존재하는 원천은 모든 이의 기쁨에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의 말대로 모든 이의 기쁨은 자기 의지로 공적인 장소, 모두가 경험하는 집에 나타나는 것이지 아름답고 화려한 공간에 매료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33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