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의 정체, 균일과 격변 등지구과학을 발전시킨 다양한 논쟁거리들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화석을 보면 지구의 나이가 약 6000살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은 재고할 필요가 없는 헛소리인 것 같다. 그런데 화석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던 옛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1670년 시칠리아에 살던 학자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실라는 시칠리아섬과 그와 인접한 이탈리아 지방에서 수집한 조개껍질을 설명하는 책을 펴냈다. 그는 그 물건들이 한때 정말로 살아 있던 조개의 껍질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은 조개 모양의 화석이 유기물과 단순한 유사성을 지닌 대상이라고 여겼다. 형태상 유기물과 유사한 무기물도 있지만, 유사한 형태를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유기체에서 유래했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결과적으로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살아 있는 유기체로부터 화석이 형성되었다는 합의에 다다른다. 화석의 존재는 다양한 사실을 시사하는데, 예컨대 지금은 사막인 지역이 예전에는 바다였다거나, 지금은 살아 있지 않은 생물이 예전에 살았을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균일과 격변에 관한 논쟁도 흥미롭다. 지질학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 찰스 라이엘은 일종의 정상 상태 이론을 옹호했다. 그 이유는 그가 현 원인, 즉 현재의 지질 작용이 아득히 긴 시간 동안 작용한다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 작용하는 원인을 제외한 어떠한 원인도 과거에 작용한 바 없다는 원리를 내세우고, 이 원칙에 따라 지질학을 구성할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에서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경향도, 이례적인 격변도 없다. 반대로 격변론자는 지구와 생명의 역사에 자신들이 ‘혁명’이나 ‘격변’이라 부르는 갑작스러운 자연현상이 개입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두 주장은 언뜻 보면 격렬하게 대립하는 듯하지만, 모두 현재론이라고 불리는, 즉 현재를 통해 과거를 이해하려는 신조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한 결과였다. ‘현재’의 작용이 현재의 강도로 일어났을 때 먼 과거에 있던 모든 일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서만 차이가 있었다.이 책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런 논쟁과 입장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는 과학이 발전하는 방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어떠한 결정적인 발견이 곧바로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참 지나고 나서는 그 발견의 의미가 명확해지지만, 그 당시에 발견 자체는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론과 입장이 경합하고 서로를 보완하면서 과학은 발전한다. 때로는 예전에 폐기되었던 이론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하나의 과학이 생겨나고 성숙하는 모습을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종교와 과학이 충돌한다는잘못된 고정관념을 겨냥하다과학의 발전과 관련되어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은, 반이성적이고 반계몽적인 종교의 도그마들을 과학이라는 합리적인 활동이 대체해간다는 것이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지구가 기원전 4004년에 시작되었다는 최초의 추론이 대표적이다. 과거의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라는 도그마에 갇혀 사변적인 추론만 내세웠지만, 과학자들은 면밀한 관찰과 논리적인 추론을 수행하면서 과학을 만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러드윅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 이성과 교회가 대립했다는 딱지를 붙이는 데는 주의해야 한다. 진짜 역사는 그렇게 추상적이지도, 깔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단 어셔가 기원전 4004년이라는 계산 결과를 내놓았을 때는, 다른 방식으로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려고 시도할 수가 없었다. 어셔는 연대기적인 방식으로, 마치 인간들의 역사에서처럼 지구에서 일어난 사건에도 역사적인 순서를 부여하려고 했는데 후대 과학자들이 이런 방식을 차용해서 지층의 순서를 따져가며 지구에 역사성을 부어했다. 그리고 당시 서구 학계의 구성을 봤을 때 지구과학이나 지질학을 연구하던 최초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과학적인 탐구 활동을 할 때 자신들의 활동이 성서가 제시하는 기록과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연구 결과를 폐기하거나 수정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성서를 계시를 전하는 저작으로 보았으며,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가 사실에 대응한다고 보는 축자주의적 입장이 종교계나 학계 내에서 주류를 차지한 적도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성서 축자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가 종교계를 대표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들이 이 같은 정치력을 발휘하게 된 배경과 맥락이 존재하는데, 이 책에서는 부록에서 이 ‘창조론’을 심도 있게 다루면서 성서 근본주의라는 촌극이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지구에 역사성을 부여한 발상’인데 이 점에서는 종교와 과학이 명확하게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세계관이나 흐름이 교차하고 경합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이론과 이론, 관점과 관점의 경쟁이지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중심으로 볼 수 없다. 이 핵심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면 지구의 역사에 관한 논의를 더욱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 독자들도 흥미롭게 읽을 만한지구과학 역사의 결정판이 책의 저자인 러드윅은 오랜 시간 지구과학의 역사를 연구해온 원로 학자다. 처음에 과학자로서 학계에 첫발을 내딛은 그는 1953년 케임브리지대학교 지질학과를 졸업한 뒤 고생물학자로서 완족동물 화석을 주로 연구했으며, 화석의 형태로부터 유기체의 기능을 추론하는 기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7년부터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로 자리를 옮겨 꾸준히 지구과학의 역사에 관한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고, 유럽과 미국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지구과학의 역사에 대한 강의와 연구를 지속했다. 지구과학사에 대한 오랜 탐구의 결실은 이 책에 아낌없이 담겨 있다. 가령 『지구의 깊은 역사』의 5장과 6장은 러드윅이 각각 2005년과 2008년 출간한 같은 제목의 저작을 요령껏 정리하는 부분이다(두 책의 분량은 708쪽, 614쪽에 달한다). 또한 과학계에 몸담은 경험을 토대로 일찍부터 과학의 시각 문화에 주목해온 학자답게, 이 책에서도 많은 도표와 그림을 활용하고 있다.이 책은 지구과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지구과학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지구과학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역사학과 문헌학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며, 다양한 학문이 교차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흐름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다른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지구과학은 엄청나게 다학제적인 분야다. 이 책에서는 지질학의 라이엘, 진화론의 다윈, 방사능 연대 측정의 퀴리, 대륙이동설의 베게너 등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와 업적이 비중 있게 소개되는데 그들의 이론이 어떻게 과학계의 승인을 받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의 주된 요소다. 그 과정에서 지금은 정설이 된 이론들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이유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했다는 이유에서 기독교인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베게너의 대륙 이동설은 당시 학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미국인이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미국인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과학은 과학이 아닌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과학사보다는 지성사라는 범주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뉴 사이언티스트》의 서평처럼 문과와 이과 모두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