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시리즈는 흥미로운 주제가 많지만, 또 나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주제도 꽤 있는 것 같다.
사실 "아침드라마"라는 주제를 보았을 때, 드라마를 진득하게 보는 경우가 별로 없는 나로서는 별 흥미 없는 주제임이 틀림없었는데, 솔직히 이 표지 그림때문에 보게 된 것 같다.
아침드라마 하면 떠오르는 단 두개의 그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쥬스뱉는 씬.
이 배우가 누구인지, 어떤 드라마인지도 알 수 없지만 이 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듯 싶다.
그리고 남은 넘사벽 장면은 바로 김치싸대기 씬.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던 김치싸대기의 희생자(?)는 주몽에서 영포왕자로 활약했던 원기준 배우로 그 사람만 나오면 흰 와이셔츠에 번지던 김치국물이 떠오르곤 한다.
어쨌든 이 책은 읽기 시작하자마자 놓기가 어려울 정도로 흥미로웠다.
수험생 시절에 보던 예능 프로그램은 일종의 낭만과 안도감을 주엇던 것 같다.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이 정도는 하고 살 수 있다는 위안 같은 것 말이다. 한편 직장인에 된 나에게 아침드라마는 식전 30분에 먹으라는 알약처럼 하루를 열기 직전에 복용하는 점막보호제 같은 것이었다. 또는 조금 치사한 방법이지만 내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와 사건을 견딜 수 있도록 비교우위를 갖게 해준 것 같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는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면서 TV를 틀어놓는 편이다.
뉴스를 보면 좋겠지만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험악한 일들을 알고싶은 마음이 없어
예능이나 평소엔 보지 않는 드라마들을 켜둔다.
저자처럼 점막보호제까지는 안 되어도 출근준비 메이트로는 꽤 괜찮다.
가끔 뒷 이야기가 궁금해 조금만 더 하다가 늦어서 뛰어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아침드라마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존폐 위기를 맞아왔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라는 놀림거리가 된 지 오래고(나도 이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매일 30분 분량을 방송해야 하다 보니 쌓여가는 참여자들의 과로(갈수록 배우들의 얼굴은 어두워진다)와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는 조악함(배우들의 어두운 맟빛은 조명을 쓰기가 여의치 않아서일 수도 있다), 제작비를 협찬에 크게 의존하면서 생겨나는 배경적 한계(거의 모든 회장님은 골프 의류회사를 운영하고, 거의 모든 주인공은 돈까스집 또는 치킨집으로 재기를 노리고, 거의 모든 주인공 친구는 지압침대 대리점을 운영한다) 등은 아침드라마의 명운을 쇠하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이로 인한 시청률 저하가 다시 제작비 저하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협찬사들의 관심도 시들해졌을 것이다. 아침드라마의 표독스러운 악역이 실장님으로 있는 의류 회사보다는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장수의 비결로 소개되는 건강식품 회사가 더 적극적으로 제작 협찬에 관심을 보였을 것임은 당연한 시장의 논리다.
저자가 이 책을 썼던 시기, 아침드라마가 폐지되었다고 했다.
몰랐다. 아침드라마가 없어졌구나.
딱 한 번 내가 엄마랑 같이 아침드라마를 챙겨봤을 때가 대학 들어가서였지 싶다.
<아직은 마흔 아홉>이던가... 뭐 그런 제목의 드라마였는데 수업이 1교시에 없으면 엄마랑 그 드라마 보며 수다떨다가 학교를 갔던 기억이 난다. 뭘 안다고 그 드라마를 봤을까나. ㅎㅎㅎ
그 외엔 시간 챙겨 볼 수가 없는 직장생활을 계속 했는데, 가끔 봐도 참 이상하다 싶었다.
늘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가 패션회사(중저가 브랜드 여성복 아니면 골프웨어 회사)이고
늘 돈까스집, 치킨집, 건강보조식품회사, 돌침대나 의료기기 회사가 주인공 주변인물 속에 등장했다.
뭐 그런건 제작비 때문이니까 봐줄 수 있다 해도 반복되다보니 뭔가 이야기가 비슷비슷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아침드라마 매니아의 분석이 꽤 그럴듯 하다.
게다가 신인들을 많이 기용해서 그런지 얼굴은 예쁜데 일차원적 연기를 보여주는 게 극이 진행되면서 더욱 도드라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어쨌든 막장드라마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아침드라마는 그렇게 폐지가 되었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리에게는 '저녁 일일드라마 아침 재방송'이라는 새로운 낙이 찾아왔다. MBC 저녁 일일드라마가 다음 날 아침에 재방송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2022년 1월 현재 방영 중인 <두 번째 남편>은 아침드라마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전개로 우리에게 즐거움울 가져다 주었다. 일찍 출근해서 그동안 아침드라마 본방송을 못보던 동생은 이제 그만큼 일찍 퇴근하기에 저녁드라마 본방송을 보게 되었다. 반면 퇴근이 늦은 나와 뜨개방이나 교회 모임 등으로 공사다망하신 이상란 여사는 저녁 7시가 되면 동생이 보내주는 즐거운 스포일러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저녁 일일드라마가 아침에 재방송된다는 희소식이 전해진다.
그래서였구나. 내가 아침드라마가 폐지된 사실을 몰랐던게.
아침에 저녁드라마를 재방송해주니 나는 그걸 아침드라마인 줄 알고 봤던 것이다.
저자는 '저녁드라마도 아침드라마 못지 않은 어마어마한 전개'라고 썼는데 아마 막장드라마의 포맷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드라마만 보면 복수심에 불타올라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러면 또 어떠리. 저자는 저녁드라마를 즐기며 이렇게 말한다.
"호관원, 일월의료기 광고 많이 해도 되니 돌아와줘요!"라고.
다양한 아침드라마를 소개했지만 내가 아는 드라마는 몇 안되었는데 저자가 <불새 2020>에 대해 적은 글들이 정말 많이 공감되었다. 우리가 많이 아는 2004년 <불새> 말고도 유인촌, 이미숙 등의 배우가 출연했던 1987년 <불새>도 방영될만큼 여러번 드라마화된 작품이다. 1987년 작품은 내가 전혀 기억을 못하는게 한참 중고등학교를 다닐때라 TV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었던 것 같고, 2004년 드라마는 본 기억이 난다.
워낙 인기가 있었던 드라마였고, 우울한 얼굴이 많았던 배우 이은주가 초반에 부잣집 딸로 출연해 오랜만에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때문에 더 유명해졌던 그 드라마를 16년이 지나서 다시 리메이크 한다고 해서 관심이 있었는데, 그 드라마를 볼 때마다 뭔가 연극적 분위기가 느껴졌다.
배우들이 연기를 못한다고 치부하기에도 애매하고, 뭔가 과장된 분위기가 시청자를 어색하게 했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지. 성공한 원작 드라마를 리메이크 했을 때 나타나는 안 좋은 결과들의 총체가 아니었나 싶다.
원작과 비교당하는 대목에서는 억울한 점이 있어서 열심히 변호를 해보았지만 사실 나도 <불새 20202>을 여느 아침드라마처럼 마냥 즐겨 보지는 못햇다. 마치 2004년에 헤어진 애인이 2020년의 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달까? 만난 순간에는 철렁 하면서도 애틋하겠지만 이내 속으로는 서로의 현재에 크게 감사하며 이렇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번은 다시 보고 싶기는 한 그런 애인 말이다.
이젠 존재하지 않는 아침드라마에 대한 추억 또는 그리움의 글,
<아무튼, 아침드라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