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규주 저
구정화 저
승지홍 저
필리프 비옹뒤리,레미 노용 공저/이재형 역
해롤드 제임스 저/안세민 역
세계적인 정치학자이자 독일의 민주주의 이론가 중 한 명인 얀-베르너 뮐러의 <민주주의 공부>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제목을 조금 캐주얼하게 바꾸어 출간했는데, 이것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됐다. 얀-베르너 뮐러는 단순히 민주주의만을 연구하는 이는 아니고 현재 포퓰리즘의 부상, 특히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과 함께 민주주의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제도적 한계와 이를 보완하기 위한 실천, 포퓰리즘의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이론가이다. 특히 포퓰리즘이 부상하는 현 정세를 고려했을 때 얀-베르너 뮐러가 포퓰리즘-민주주의를 어떻게 분석하는지 보는 것은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고 거의 모든 나라가 처한 화두가 되었다. 책 ‘민주주의 (운영) 룰’의 4장은 민주주의 다시 열기로 끝을 맺는다. 민주주의를 짓밟는 도둑정치와 비선 실세의 속박을 촛불혁명으로 가까스로 벗어났으나 본격적인 개혁에 민주당은 거대 의석수에도 손놓고 지냈음이 정산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애석하게도 정당이 책임 있는 태도로 신뢰를 회복하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지금까지 누려온 혜택과 현행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가려고만 한다. 믿고 맡겼던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크다.
국운이 기우는데도 더불어민주당은 복 받았다. 당원들이 알아서 ‘플랫폼 정치’에 맞춰 역동적인 정치 참여를 모색하고 힘을 실어주니 말이다. 두 번의 선거에 연이어 패배했음에도 돌아서지 않고 응원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굴러온 복을 찬다. 자기들이 가질 수 없다면 당을 공중분해 시키려는 듯이 조직적으로 질리게 꿈틀댄다. 투명한 국정 운영과 개혁 과제를 위해서 그리 힘썼더라면 사랑받는 정당과 정치인으로 부상했을 것이다. 두더지 게임도 아니고 ‘나도 반개혁’이라고 고개를 들고 나오는 의원들 때문에 당원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울분과 회의감이 장난이 아니다.
완장과 배지만 달면 본연의 뜻과 정체성을 잃어버리니 여의도 정치 물이 어떤지 대충 짐작이 된다. 정치철학자 저자가 말한 민주주의 필수 인프라이자 매개 기구인 정당과 언론이 접근성이나 정확성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이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정치 카르텔을 시민의 ‘검토하는’ 눈과 손이 겨우 막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대중과 편먹고 손잡는 게 아니라 소통을 차단하고 자기들이 만든 조직 안에서 ‘불투명하게’ 룰을 손보는 꼼수를 부린다. “한 가지 정답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기술관료적 해결지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191).”
시민이 정당의 주요 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정치 바우처”(후원금과 기부)를 냄에도 정치적 효능감을 전혀 주지 못한다. 굥 지지율이 하락하고 초당적 국가 조직 편성과 국정 운영이 엉망인데도 야당 민주당은 ‘셀링 포인트’를 쌓지 않고 내부총질하며 자기정치에 몰두한다. “과두 지배 계급”의 변덕과 설득 과정 없는 일방적인 통보에 당원들이 열 받는 사태가 번번이 일어난다. 의도적으로 시민들을 “전장의 안개”로 유인하여 분열시키고 흩어지게 하는 모양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가.
하지만 그들이 놓치는 사실이 있다. “정치가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기인식을 새로 만들어(196)” 내는 참여 정치 시대라는 점이다. 자기들이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면서 어떻게 “전투적 민주주의”를 간과하는지 모르겠다. 언론계와 검사 쪽 출신의 엄중론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들의 시위와 라이엇은 맞고 지금은 무조건 틀리다는 궤변이 아닌가. “민주주의 게임”을 지배하려는 꼼수는 ‘민주주의 수호자’인 시민들에 의해 저항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분노는 이성을 넘어선 격렬한 열의가 아니라, 내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구조적으로 발언권이 부정당하고 있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한 감정이다. (212)
반개혁파 의원들은 열성지지자들을 ‘시민답지 못한’ 시끄러운 폭도로 몰고 싶겠지만 지금 당사 앞의 평화 집회는 일종의 ‘시민 불복종’으로서 더 나은 길을 찾는 “좋은 말썽” 혹은 “필요한 말썽”임이 증명될 것이다. 집단지성은 “구경꾼의 집이나 자신의 집을 불태워(217)” 버리는데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목표물을 향해서만 거센 들불이 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이디어와 이해관계,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대표의 등장에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가능성 안에서 존재한다(221).”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는 사람들에게 가닿고 사람들이 와닿을 수 있는 존재다. (120)
3장 필수 인프라를 통해 요즘 민주당을 향해 느끼는 답답함과 한심함과 짜증의 이유를 헤아릴 수 있었다. 민주주의의 핵심 인프라는 정당과 언론이며 이들을 매개 기구로 시민사회가 결집한다. 앞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민주주의는 ‘제도화된’ 불확실성을 기반으로 구성해나가는 방향을 띤다. 헌데 보수당도 아닌 민주당이 정치적 갈등을 드러내는 발언이라 할 수 있는 대중 다수가 침묵할 것을 강요한다. 한마디로 말해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정의 철칙”을 의연 중에 따르며 위선과 독선을 취해있다.
가장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선거’에 대한 개념이다. 선거는 질 수 있으며 이번의 패배가 영원한 야당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을 위해 준비하는 전환과 성찰의 자세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정당은 선거에서 이기도록 표를 모으는 원팀이 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의견을 숙론하는 과정 속에 “분열의 시각화”가 불가피하지만 선거 때는 다르다. 그런데 현재 민주당은 민주주의의 “다원주의”와 사실에 기반한 ‘상대주의’를 허용하지 않고 대중 정치를 폄훼하고 두려워한다. 특정 정치 세력의 욕구와 이해관계를 중심에 둘 뿐 대중에게 공적 토론과 ‘선택지’를 기본적으로 주지 않으려 든다.
다원주의하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인생 경험과 가치관, 기질에 따라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게 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에 단일하고 온전한 하나의 진실을 제시하는 게임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대로 정치에서의 유일한(단일) 진실은 독재적일 수밖에 없다. (129)
신문과 커피하우스의 살롱 문화에서 이제는 온라인 민주주의 시대다. 이에 발맞춰 과두정이 아닌 단체 줌회의 방식의 “디지털 플랫폼”과 “플랫폼 정치”가 꾸려져야 한다. 대중은 “자기인식”에 따라 이익과 정체성을 발언하고 “시민적 친애”를 바탕으로 결사의 자유를 갖는다. 풀뿌리 모임 등 여러 생각이 다듬어지면서 활기차고 역동적인 정치 실험과 참여가 가능해진다.
예전과 달리 수익 관계(건설 부르주아지 사주)로 엮인 미디어들은 중립성을 내세워 “받아 적는” 데에 그친다.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온라인 미디어에서도 (재)확인 작업을 통해 얼마든지 상황 해석을 가미하는 책임 보도가 이뤄질 수 있다. 현재 언론 생태계는 지역신문의 사막화로 지역구 의원의 의정활동이 보도되거나 책임을 묻지도 않는 구조이며, 전국 뉴스에 의존하며 당파적인 대립이 강화된다. 게다가 알고리즘이라는 ‘감시’ 자본주의 체계에서 (검색하는 순간 검색 당하며) 정치적 정체성이 편향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런 환경에서 중도는 사실상 신기루에 가깝지 않을까.
이렇듯 민주주의 시스템은 구성적 선택지를 제공해야 하는데, 소수의 당내 권력자가 경청과 토론보다는 여론조사와 정치 평론에 무게를 두고 “공동의 지지”(에코 챔버)를 받는 대중 정치로 악마화하는 모습이다. 인터넷 민주 사회에서 대중의 무지성과 “비이성의 전염”을 성토하며 기술관료(전문가)의 판단과 결정을 단독 주장한다면 그 자체로 반정치적이며 다원주의에 위배한다. 이와 같은 “카르텔 정당(정치)”은 새로운 플레이어의 진입 자체를 방해하는데 최근 전당대회에 임하는 후보들의 발언이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개인을 숭배해 사당화할 위험 혹은 방탄적 이용을 망발한다. 포스트-대의 정치의 시대에 1인 1표로 직접 참여하겠다는 플랫폼 정당의 열성지지자를 수용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해보겠다(We can.)는 정치 참여를 테크노크라시와 포퓰리즘으로 일축하고 얼룩진 렌즈로 왜곡시킨다. “온라인 살롱”을 발판으로 아고라로 나온 지지자들의 관계 맺기와 결사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책 ‘민주주의 공부’에서 말하는 민주주의 핵심 인프라는 정당과 언론의 매개를 통한 시민사회의 구성(행동)력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