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이란?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열린 웨스트민스터 회의(Westminster Assembly)에서 작성된 장로교의 신앙문답서로, 칼뱅주의의 주요 교리 및 십계명, 주기도문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소교리문답 외에도 목회자들이 회중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용도로 사용하는 대교리문답이 있는데, 이는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교리를 체계적으로 선포할 수 있게 한 것으로 196개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소교리문답은 어린이들에게 체계적으로 교리 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대교리문답을 요약하여 만든 것이고, 107개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07년 독노회(제1회 독노회)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을 교회의 표준문서로 채택했다.웨스트민스터 회의는 목회자 121명, 의회에서 임명한 평신도 대표 30명이 참석해 1,163회 이상의 모임을 가졌는데, 영국 의회는 당시 국제적으로 저명한 신학자였던 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e, 1578-1646년)를 의장으로 지명했다. 1643년 7월 1일에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대예배실에서 의장인 윌리엄 트위스의 설교로 첫 번째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회의는 처음에는 헨리 8세 예배실, 나중에는 예루살렘 예배실에서 모였다. 1643년 7월 6일에 영국 의회가 이 회의에 명령한 과제는 영국 국교회의 신앙고백서였던 39개조 신조(Thirty-Nine Articles) 중 처음 열 개의 신조를 검토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회의는 그 신조 전체를 성경에 비추어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39개조 신조를 대체할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검토하는 일은 1646년 8월에 시작되었고, 의회는 교회 검열, 교회 회의, 결혼에 관한 자들을 수정해 1648년 6월 20일에 최종적으로 이 신앙고백서를 승인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에서는 이미 1647년에 이 신앙고백서를 초안대로 아무런 수정 없이 채택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교리문답에 대한 검토를 1643년 12월부터 계속 진행해왔기 때문에 1647년에 끝마칠 수 있었다. 먼저 작성된 대교리문답은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교리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대교리문답을 토대로 작성된 소교리문답은 “초신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간결하게” 교리를 제시한 것이었다.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영국 종교개혁 전통의 산물로, 39개조 신조 그리고 아일랜드의 아르마그 대주교였던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년)와 그가 1615년에 작성한 아일랜드 신조를 근간으로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참석한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유럽의 종교개혁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럽의 종교개혁 신학자들과의 빈번한 서신 교환을 통해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또한 그들은 성경적 지식을 강조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신학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종교개혁 이전의 영국 신학 전통 위에서 활동했다. 이 회의의 의사록은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주의적인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한 것들로 가득하다.알렉산더 화이트와 소교리문답이 책은 소교리문답의 문과 답을 제시한 후 알렉산더 화이트가 해설을 덧붙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교리문답은 거의 모든 질문을 대답에서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대답만으로도 완전한 명제 또는 문장이 되는데 이를 통해 학습자는 교리에 관한 지식과 경건을 증대할 수 있다.특별히 화이트는 소교리문답을 해설하는 이 책에서 자신의 전임자였던 캔들리쉬와 자신이 전기를 쓴 여러 인물을 비롯해 존 번연, 장 칼뱅, 토머스 보스턴 등 수많은 청교도 및 개혁교회 신학자와 저술가의 글을 인용했다. 따라서 그의 강해는 우리로 하여금 소교리문답에 대해 많은 신학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였는지를 입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