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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사과에겐 '힙스터 작가'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설탕의 맛]이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아 다른 이들의 서평을 먼저 읽고 있다보니 힙스터, 레퍼런스가 없다 는 식의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는데 생소한 단어들이라 지식검색을 이용해 보기까지 했다. 갑동이 잡는 형사는 아니지만 궁금한 건 못참으니까.
힙스터는 1940년대 등장한 속어라고 했다. 자신만의 패션과 음악 그리고 문화를 쫓는 부류로 그들은 트렌드를 쫓지 않는 성향이 강하단다. 히피들을 뜻하는 것일까? 그런 힙스터 작가라니 단어만 들어도 딱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스타일이 있는 작가라는 느낌이 드는데 이름 또한 특이하다. 사과라니. 2005년 소설 '영이'로 등단한 작가의 이름 옆에 쓰여진 '방실'이 본명인가 보다. 요시모토 바나나처럼 국적없는 이름을 원했던 것일까. 어쩌면 풋풋한 내음이 또 때로는 농익은 느낌이 드는 '사과'라는 이름의 작가가 낸 [설탕의 맛]은 그제서야 술술 읽혀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소설의 내용을 담은 책이 아니다. 작가의 에세이면서 여행기면서 뉴욕을 비롯한 베를린 등지를 옮겨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을 쏟아놓은 글모음이다. 여행지에 대한 소감을 적은 여타 여행작가들의 책과는 그래서 차별화 된다. 김사과의 글이니까. 애초부터 여행지에 대한 여행정보나 감상따위를 적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그 장소에서, 누군가와 함께하며 머릿 속을 스친 생각들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게 남겨져 있다.
p5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경멸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그 곁을 맴돈다.
하지만 그 이후 떠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내겐 이 문장만이 두 눈을 파고 들었다. 그토록 떠나고자 했으면서도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나의 입장과 그녀가 쓴 문장이 100% 싱크로율로 합쳐졌기 때문에. 언제나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미련따윈 없는데도 말이다. 여건이 되지 않아라는 말도 이젠 변명처럼 들린다. 그녀쳐럼 훌쩍 떠날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읽는 내내 책은 내게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여행에 대한 환상이 아닌 떠남에 대한 목표를 확고히 다질 수 있는 다짐서처럼. 그녀처럼 나도 소음이 가득한 거리가 싫다. 이기적이면서 다른 생명들을 향해 칼끝을 겨눌 수 있는 인간들도 싫다. 그저 글의 바다에 빠져 조용히 지내고 싶다. 하지만 가끔 그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들의 틈에 슬며시 끼고 만다. 나라는 인간과 달리 김사과는 적어도 인생의 길을 자주 잃지는 않는 현명한 작가처럼 보여졌다. 그래서 그녀가 강해 보인다.
사과라는 이름이 이토록 단단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그녀 덕분에-.
하여 이것은 동시대의 여행에 관한 어떤 환상도 슬픔도 없는 기록이며 동시에 냉소와 환멸로 가득 찬 가짜 여행기다(가짜가 바로 우리들의 리얼리티이므로). 이 여행기에는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여행기에서 기대하는 것들(진실하고 고유한 경험, 여행산업과 미디어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그 환상, 마치 식욕을 자극하듯이), 다시 말해 낭만적인 모험으로 가득한 여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것은 글로벌비즈니스가 쌓아 올린 쓰레기더미다. (_12)
글쎄, 천재 또는 엘리트라는 푯말을 달고 있는 그녀의 루트를 일반적인 내가 이해하기란 처음부터 쉽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수전 손택 정도가 되었다면 이기적이게도 난 다르게 읽었을지도 모르지. 여튼, 이웃 블로그에 극찬을 통해 궁금증이 생겼고 여행에세이라고 하니 좋아하기도 하고 가볍게 읽기 좋을 것 같아 주저 없이 책을 들었다. 또 사진 몇 장 없는 구성의 책이 유행처럼 번져가는 여행 에세이와 다르기도 했고. 그런데 책을 읽을 수록 영 나와는 맞지 않았다. 감성의 단물은 모조리 뺀ㅡ홍인혜 작가와는 또 다르게ㅡ, 그녀의 일상적이고 담담한 시선은 내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이방인으로, 고민만을 안은 채 표류하고 있는 그녀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한편 대도시 한폭판의 일상이 나를 괴롭혔다. 즐거움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끝없이 돈을 써야 하는 삶. 매일 저녁 장을 보러 슈퍼마켓에 가는 것이 지겨웠다. 게다가 번화가 한복판은 물가가 너무 비싸서 대형 마트에 가는 것이나 백화점 식품관에서 배달해다 먹는 것이나 비슷한 비용이 든다는 충격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저녁이 오면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다녔는데 카페와 술집과 카페와 옷가게와 옷가게와 옷가게와…. (_92)
그녀가 들려준 옥스퍼드 대학 공부벌레들의 실체는, 한국의 젊은 엘리트들과 다르지 않았다. 끝도 없는 경쟁, 스펙 쌓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초딩 수준에 멈춰버린 감정고 표현력,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나는 독특한 기행들. 우리는 자주 이 맛이 가버린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_103)
깊게 읽었어야 했는데 이런, 저런 핑계도 설렁설렁 읽었던 것도. 그녀는 어떤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 채 책장을 넘겼던 것도. 그녀의 책에 흥미를 반감시켰던 무의식적 행동일 수도 있다. 무작정 감성을 깃든 여행 에세이가 아닌, 사무적인 통찰력으로 인물이나 풍경을 이야기 하는 그녀가 낯설었을 수도 있고. 결국 나는 공감은 하지만, 동감해 줄 수 없는 혹은 동감하고 싶지 않은 글들 사이를 헤맸다.
그녀의 글을 통해 ‘나’란 사람을 보고 만다. 좋은 말로 포장하고 위장하며, 도망가기 위해 애쓰던 나를. 단물이 넘쳐 흐르는 여행 에세이에서 나약한 기대를 품고 원대하게 떠나겠다고 꿈꾸는 나를. 그들처럼 감성과잉으로 이곳 저곳을 흐느적대며, 실은 돈이 없어 빵 한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그런데 이런 나를 나는 내치고 싶지 않다. 서늘한 사회를 담담히 바라보며 ‘별거 없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결국 똑같아’라고 조소 섞인 목소리로 귓속말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맛보지 못한 단물에 입맛 다시며 오늘도 그날을 손으로 세며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는 것이니, 그것에 비한다면 꽤 괜찮지 않나. 글쎄, 조언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환상적이진 않아’ 그렇지만 덧대고 싶다. ‘그래도 해볼만해. 어서 나와봐!’라고.
글쎄. 예술가들은 예술가끼리 알아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와 같이 도망치듯 뛰어든 자들의 이야기가 더 편하고 좋다. 결정을 하기 전에 수도 없이 흔들렸고 불안에 움츠릴 수 밖에 없는 그들을. 그래서 김동영 좋고, 이병률이 좋고, 홍인혜가 좋다. 현상을 직관하는 대신 감성을 심어주는 것. 아무리 돌아봐도 우리는 감정 결핍이다. 어떻게 표현할지도, 어떻게 표출할지도 잘 모른다. 아직 나는 ‘겨울 왕국’ 같은 이야기가 훨씬 더 필요하다.
최근 작가 김사과가 예전에 쓴 글이 회자되면서, 힙스터 작가=김사과의 공식이 된 것 같다.
힙스터로 검색하다가 김사과의 에세이 '설탕의 맛'이 힙스터의 정석 같은 책이라는 글을 보고 도서관에 신청했다.
그리고 한달을 넘게 기다려서 지난 주말 읽었다.
이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을 정리하기 힘들어 트위터에서 검색해보니, 누군가가 김사과는 레퍼런스가 없는 작가라고 말을 한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아 그렇구나, 했다.
그래 설탕의 맛에는 여러 가지 책, 음악, 미술 등 예술문화와 관련된 것들이 수도 없이 언급되지만 그에 대한 레퍼런스가 부족하다.
어쩌면 그녀는 어차피 구글 검색이면 다 알 수 있는 것들이잖아? 라는 가벼운 기분으로 레퍼런스를 붙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만약 이 책이 1990년대 아직은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던 시절에 나온 것이라면 엄청난 호응을 얻을 수도 있었겠다, 마치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던 서양생활, 스파게티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재즈를 듣는 그런 생활, 1990년대를 산 젊은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상황, 을 보여줘 인기를 끌었다고 평해지는 노르웨이의 숲.
1990년대의 젊은이들은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세대였지만 즐길 거리가 거의 없어 유학생들, 압구정의 오렌지족, 이 어느 정도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만약 <설탕의 맛>을 보여주었다면 그녀가 누린 생활이 그 자체가 하나의 롤모델이 되었을텐데 지금은 '너 왜 다른 데서 나온 이야기 마치 니가 제일 먼저 생각한것처럼 쓰는 건데?' '너만 아는 거 아닌데?'라는 평을 듣는다. 그녀는 본인이 경험하지 않은 과거를 기반으로 글을 쓰는데 그 부분에서 레퍼런스가 나타나지 않는것 같다. 과거는 아무리 우리의 기억 속에서 변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진실에 가까운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이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항상 따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과거를 잊은 문학이란 있을 수 없다는게 중론이니 어쩔 수 없나? 그런 면에서 과거나 역사와 거리가 멀었던 하루키의 초기 소설들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갑자기 힙스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 2010년 초반에 잠깐 떠올랐다 사그라진 단어이다. 아마 홍대앞 자영업자들이 홍대의 가게세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제주도에 사람이 넘쳐나면서, 자연스레 세월이 지나면서 그렇게 사라졌겠지. 그리고 버스커버스커가 아무리 인기를 얻어도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밴드 음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것도 한몫했겠지.
어쨌든 웬일인지 김사과의 글이 다시 회자되고, 킨포크 매거진이 한국어로 발매되고, 힙스터가 은퇴하는 도시, 포틀랜드를 일본에서 띄워주고, 모든 건 다시 2010년으로 돌아가 '야 힙스터가 좀 그러면 에코, 그린라이프로 다시 분위기 살리는 건 어때?'라는 모드가 조성되고 있고,
그런 시기에서 김사과의 <사과의 맛>은 힙스터 입문자들에게 바이블이 될 수도 있을텐데, 출판사가 쌤앤파커스라 이미 힙과는 거리가 멀어서 실패다.
전혀 힙하지 않아,
그는 타고난 예민함에 더해 한량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온 영향으로 까다롭고 좋은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추천한 식당은 하나같이 맛이 있었고, 고급문화에서 하위문화까지 모드를 게 없는데다가,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매력적인 미국 예술가들을 잔뜩 알고 있었다.
작가가 뉴욕에서 방을 빌린 집 주인 헨리, 미국내에서 정의하는 뉴욕 힙스터에 가까운 인물로, 부자인데 히피인 부모를 둬서 부모 덕에 돈 걱정 없이 임대소득 등으로 놀고 먹으면서 가진 건 돈과 시간 뿐이라 남들이 안 읽는 책 읽고, 공연 보고, 음악을 들어 취향은 한껏 높아지는데 그걸 창조적으로 풀 능력은 없어 그냥 세월을 보내는 돈 많은 한량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포르투, 베를린 등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비슷하다. 공부를 길게 하거나 집에 돈이 많아 자원봉사하며 지내거나,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당장 길거리 노숙을 해야할 경제능력이 제로에 수렴하는, 그저 놀고 먹고 책 읽고 음악 듣고 춤이나 추는 청춘들.
마치 그런 청춘들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양, 쿨하고 멋진 듯, 그려진다.
20년 전이라면 동경의 대상이 되었을, 지금은 '힙스터 나부랭이'라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이미 힙스터라는 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다들 질려 버렸을텐데,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