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8월 16일
2018년 07월 24일
때때로 다른 나라의 교육 방식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기가 오는데요.
요즘은 핀란드 북유럽을 거쳐 프랑스 교육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언뜻 보기에 별다를 것 없어보였던 프랑스 교육과 아동, 가족 복지에 대한 저자의 실생호라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쓰여져 있습니다.
칼리의 사고 방식과 언어의 확장 등이 한국아이들과 다른 것은 프랑스식 생활과 교육의 바탕때문이었는데요.
아이를 키운 엄마로서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아이의 사고와 토론, 언어 확장을 지원해 줄 수 있을만한 팁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서로 생각을 주고 받으며,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어갔다. 처음에는 좁은 보폭으로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나중에는 씽씽 달려가는 아이를 잡으러 가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아이는 내게 셋아을 보는 새로운 창을 열어주고, 나는 종종 나의 창가로 아이를 데려와 내가 바라보는 창으로 세상을 보게 해주었다.(p.5 들어가는 말)
나는 지금까지 아이의 삶이 행복했는지 급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후회없이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면 어느 순간 인생이 멈춘다 한들 무엇이 아쉬우랴'라는 대범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가 누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지 말지어다. 그날 이후 내가 얻은 하나의 원칙이다. 그날부터 자기전에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 행복하게 보냈어? 칼리아, 넌 행복한 아이니?" 아이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면 서로 이마와 볼, 코에 뽀뽀를 전하고 아이를 꿈나라로 보내주곤 한다.
이 경이로운 존재와 삶을 같이한 지 13년, 나와 아이 아빠는 매일 아이를 열광적으로 맞이한다. 아침 식사를 하러 눈을 비비며 식탁으로 다가올 때, 현관문을 딸랑이며 학교에서 돌아올 때, 일요일 늦은 아침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엄마와 아빠 사이로 점점 덩치가 커져가는 토끼 한마리가 파고 들어 올 때 우린 "칼리다"라며 환호성을 지른다.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p.5-6 들어가는 말)
1장 아이는 온전한 인격체다
부부 애정을 중심으로 가정을 꾸려나가라는 이야기는 '너 자신의 인생을 먼저 존중하라'는 이야기와 같다. 주례사에서 시장이 굳이 '아이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고'라고 표현한 것은 흔히 아이를 핑계로 부부의 돈독함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p.17, 프랑스에선 육아가 쉽다고요?)
내 기억에 희완(칼리아빠)은 한 번도 칼리를 아이로 취급하지 않았다. 작은 몸을 가진 성숙한 인간으로 대했다. 매사 아이의 의견을 묻고 이유를 설명하고 아이의 의사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 점에선 나도 비슷했다. 아이를 성숙한 인격체로 대하겠다는 다짐을 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우리만큼 세상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p.57, 8개월에 시작된 칼리의 사회생활)
프랑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자립을 훈련받는다. 마치 아이를 자립시키기 위해 낳은 것처럼 프랑스 엄마 아빠들은 이 미션을 필사적으로(보일만큼) 철저하게 수행한다. 삶의 중심은 아이의 부모인 부부 중심으로 흘러가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자식은 공동의 삶에서 얻은 열매일 뿐, 삶의 줄기는 아닌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의 기축이 온통 아이 중심으로 흘러가버리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p.58, 프랑스 물만 먹으면 되는 일, 프랑스 아이처럼)
프랑스와즈 돌토가 이후 1세기 동안 프랑스 부모들이 금과옥조로 삼은 몇가지 금과욕조로 삼은 몇가지 명료한 결론을 내놓는다.
첫 번째, 아이는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ㅔ다. 앞으로 어른이 될 존재로서 미래에 지닐 가치로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완전한 인격체를 지니고 있다.
두번째,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 당시(1930년대)로서는 혁명적인 내용이었고 우리는 여전히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세 번째,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라. 아이들은 언제나 자기 삶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있다. 진실이 올바로 전해지면 아이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그러니 아이에게 왜곡된 진실을 전달하지 말라.
넷째, 모든 것은 언어다. 말 뿐 아니라 시선, 손짓, 표정, 태도, 걸음걸이 등 이 모든 것이 언어다. 신생아들도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소통하려 한다. 그러니 주저 말고, 최초의 순간부터 아이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라(p.67, 프랑스 육아철학의 기초를 만든 '돌토'라는 신화)
아이는 사물이나 음식 등에도 인격을 보여하는 경향을 자주 보였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어린 시절 그들에게 동등한 생명체로서의 존재감을 생생히 느겼던 것 같다. (p.72, 왜 세상의 모든 꽃들은 다 예뻐?)
처음에는 유난히 꼿꼿한 자세로 걷는 이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몸이 너무 꼿꼿하다 못해 뒤로 졎혀질 것 같다고 느꼈다. 실은 약간 굽히고 있던 사람은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그저 반듯이 허리를 펴고 서 있었을 뿐이다.(P.80,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들)
'봉주르','실트플레','메르시'. 아이들이 말을 시작하면 이 세가지 말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주변의 모든 어른들이 가세해서 가르친다. '봉주르'는 '안녕하세요'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는 무조건 이 말부터 꺼낸다. 이 말을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면 상대방이 눈에 힘을 빡 주고 "봉!주!르!"하고 힘주어 말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예의 좀 갖추시죠"라는 뜻이다. '실트플레'는 공손하게 부탁하는 말이다. 직역하면 '네가 원한다면'이란 뜻이다. 모든 명령문에 붙어서 명령이 아닌 부탁이 되게 만들어주는 영어의 '플리즈(Please)'에 해당하는 말이다. ...급식소에서 식판에 밥을 담아줘도 '메르시', 카페에서 물을 한잔 갖다 줘도 자동적으로 '메르시'라고 말하도록 훈련받는다. 그렇게 수백, 수천번 반복한 끝에 자동적으로 세 문장이 튀어나오는 정도에 이르면, 사회 생활 중에 사람들과의 부딪힘을 막아줄 에어쿠션 세 개를 몸에 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만인을 향한 존중의 언어인 동시에 그들과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나를 지키는 언어였다. '메르시'를 넉넉하게 말하는 사람은 우아함을 획득하며, '봉주르'를 자주 건네는 사람은 너그러워진다. '실트플레'를 잊지 않는 사람은 품의를 얻게 된다.(p.81-82, 세상살이를 위한 세가지 에어쿠션)
내가 받고 싶은 대접을 남에게 더도 덜도 말고 똑같이 해주는 것, 아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이니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면서 인내심을 갖게 하는 것. 그러한 인본주의적 태도가 이 나라 유아교육의 바탕이기도 했다.(p.84, 세상살이를 위한 세가지 에어쿠션)
프랑스 교육부는 '시민윤리'교육의 목표가 '미래의 책임 있는 시민'과 '비판적 이성을 가진 성숙한 시민'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힌다. 근대 시민사회의 시작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으며, 저항의 출발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냉철한 이성임을 그들은 부인하지 않는다.(p.109, 내겐 권리가 있어)
2장 등수가 사라지면 우정이 피어난다
'리스펙트'라는 영어 동사와 비슷한 프랑스어 단어 '레스펙테'의 의미는 영어의 맥락과는 조금 다르다. 영어의 '리스펙트'가 누군가를 우러러보고 따르는 비스듬한 경사의 상하 개념 속에서 작용하는 존경의 감정이라면, 프랑스어의 '레스펙테'는 수평적인 관계선상에서 누군가를, 그러니깐 그의 말과 생각, 의견을 신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p.128, 그들이 하지 않는 질문,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
마지막 전체 평가도 점수가 아니라 두 줄의 문장이다. "열심히 노력했고 결과도 매우 만족스럽다. 이젠 좀 더 빠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마치는 노력을 해볼까?"
아이를 기분좋게 해주면서 약간의 채찍을 던지는 문구였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평가였다. 그리고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와 견주어 어떤 점에서 나아져야 하는 지를 제시해준다. 경쟁의 대상의 옆 사람이 아니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라는 사실, 너무 다행스럽다.(p.157, 초등학교의 빨강, 노랑, 초록 성적표)
3장 아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볕
둘의 관계에서 평등을 요청하고 촉구하는 쪽은 언제나 나다. 평등해야 한다고 의식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린 사실 완벽하게 평등하지 않다. 1세계의 남자는 자신이 아무리 평등해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세상의 중심에서 세계사를 주도해나갔다는, 수백 년 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다. 호통을 쳐서 깨우쳐주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그림자를 밟고서 있으며, 누군가의 노동 위에 제 안위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p.301, 평등에 온 몸을 적시다)
평등의 감수성은 내가 나보다 강한 사람들과 대등해져야 한다는 사실 뿐 아니라 나보다 약한 존재들(난민 어린이는 물론이고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나만큼 존중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생명의 무게는 같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생태 근본주의자의 심리다.(p.304, 평등에 온 몸을 적시다)
깔랑은 너로 인해 내 속에 생성된 달콤함을 녹여 너에게 전달하는 행위다. 그래서 그것은 주는 행위인 동시에 다시 받는 행위다. 나에게 달콤함을 생성하게 하는 상대와의 깔랑은 불가역적이다. 말없이 몸으로 위무하는 등 두 마리의 동물처럼 그 단순한 몸의 언어는 우리의 인생에 닥쳐왔고, 앞으로도 닥쳐올 슬픔과 환멸들로부터 우리를 쓰다듬어주는 포근한 깃털이다.(p.306, 깔랑, 내 속의 달콤함을 전달하는 행위)
4장 경쟁하지 않을 자유
공부하는 것은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권리예요.(가브리엘 포레 고등학교 3학년생들)
한국의 10대들과는 달리 프랑스의 10대들이 누리는 한가지 엄청난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경쟁하지 않을 자유다. '경쟁하지 않을 자유', 이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경쟁 대신 협력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우고, 경쟁으로 마모되지 않은 에너지는 세상을 개혁해낼 조직된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p.381, 필요한 것은 조직된 힘, 승리의 기억, 외침을 들어주는 귀)
프랑스의 민주주의와 학교는 같은 시기 같은 동기로 태어났다.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시민이 통치하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그 시민 일반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학교다. 그런 학교가 혁명의 정신을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고, 존엄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멋진 일이었다. 불평등이 가해질 때 항의할 수 있고, 자유가 위협받을 때 광장으로 뛰쳐나가 자유를 엄호할 수 있으며, 존엄이 짓밟힐 때 그것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이는 학교와 학교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생활을 통해 이 모든 가치들이 선언되고 위협받고, 다시 수호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선언만으로 지켜지는 것은 없다. 매일 이 선언을 부수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이뤄질 때, 그것을 지켜내려는 노력 또한 숨 쉬듯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한다.(p.418-419, 나오는 말)
<프랑스 아이처럼>이라는 책이 꽤나 흥미로웠던 나는 이 책을 이어 읽어보았다.
‘여행,육아,학교’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꽤 유익했던 책이다.
한국인인 저자가 프랑스인 남자를 만나 딸(칼리)을 낳고, 프랑스에서 아이를 기르면서 보고 생각하고 느낀 점들을 풀어놓고 있다.
프랑스에서 임신, 출산, 육아,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여행을 하면서 그 나라의 겉모습과 느낌 정도는 느껴볼 수 있지만, 실제 그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잘 와닿지 않는다. 실제로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런 기회를 갖기는 어렵다. 이런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속살을 들여다보는데, 꽤나 흥미롭다.
임신으로 인해서 회사에서 다른 동료에게 피해 아닌 피해(?)를 주거나 도움을 받게 되었을 때, 내가 “죄송해요.”라고 말하자
“당연한 걸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도와야 한다잖아요.”라고 말해주던 선배들이 있었다.
그렇지. 내 아이를 기르는 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아이를 기르는 일이 아닌가.
역대최악의 출산율이라고 하는데, 사실 아이를 낳아 기를 문화적인 여건을 만들어주면, 출산율은 저절로 증가한다. 우리 사회가 더 나아져야 한다. (개인을 탓할 일이 아니라, 정치권에서 나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1.육아를 철저히 공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프랑스 사회의 시스템은 정말이지 부러웠다. (독박육아(?)가 아닌 함께 하는 육아!!)
-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부모의 삶이 무너지면 안 된다. 아기의 삶이 중요하듯 부모의 삶 역시 중요하다.
2.공화정의 탄생과 함께 탄생한, 비판적 의식을 지닌 깨어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제도도 인상적이었다. (인간은 모두가 존엄하며 각자 권리를 지닌다. 나도 소중하고, 너도 소중하다. 우리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 일어나면 학생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거리로 나온다.자유,선택,책임)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은 거대한 정치·경제 이슈뿐 아니라 학교 내부의 모순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들도 전개한다.”
3.아이들끼리 경쟁할 필요가 없는 학교의 문화도.
-친구들이 경쟁자가 아니라면. 나는 너보다 더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빨리빨리 먼저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배우는 자체가 중요하다. 과정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등수가 없는 세계에선, 내가 점수로 판단되지 않으므로 남에게도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점수 너머에 있던 더 많은 각자의 특징을 보게 된다. 점수로 인간을 평가하는 획일적인 기준이 사라지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제들이 아이들의 삶 속에 들어가 펼쳐진다. “ -본문 중
천천히. 배움의 즐거움을 우리 아이들이 맛볼 수 있다면!!
-아이의 행복을 위해 부모는, 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화와 소통. 철학하기(철학 아틀리에!)
“ 중요한 사실은 아이에게 ‘철학 아틀리에’는 생각의 놀이터였다는 점이다.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생각의 세계를 서로 열어젖혀 핑퐁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넓어지고 즐겁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본문 중
-문화체험의 중요성(예술의 즐거움. 여행)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어떤 문화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엄마로서,교사로서 ‘행복한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프랑스 아이처럼을 읽고, 목수정이라는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에서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한번쯤 학창시절을 보내 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어엿한 사회인으로 키워진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편 읽으면서 내가 한국 사람이니 이렇게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대목들도 있었다. 어쩌면 단시간에 얻어질 수 없는 훈련을 추구하는 교육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읽기 쓰기 등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부분에서의 훈련 같은 건 특히나 그렇다. 내가 프랑스인으로 자라지 않아 낯선 얘기들이 많지만, 많은 부분에서 영감을 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