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의 관점으로 살펴보는 ‘그림 대작’ 사건
― 미켈란젤로부터 렘브란트와 루벤스, 반 고흐를 넘어 워홀과 뒤샹, 무라카미 다카시의 사례까지!
지난 2016년, 세상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TV 뉴스에서는 가수이자 화가인 어느 연예인의 얼굴이 반복적으로 비춰졌고 그를 보면서 입 달린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씩 거들었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언행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없지 않던 인물인지라 사건이 불거진 후 그를 향한 대중과 언론의 시선은 대체로 싸늘했다. 심지어 그는 ‘사기꾼’으로 회자되었다. 이른바 ‘조영남 그림 대작’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 후 격렬한 논쟁을 낳았고, 급기야 2016년 12월 21일 검찰은 “조 씨에게 (사기의) 기망행위가 있었다”라고 보고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미술가단체에서는 그에게 추가로 ‘명예훼손죄’를 물어 소송을 제기했다. 일반 대중 역시 ‘조영남은 사기꾼’이라는 프레임 안에 있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이들이 앞뒤 따질 것 없이 조영남의 행위는 어떤 의미로든 ‘사기’라고 판단했다. 극소수만 조금 다른 의견을 냈다. 그중 한 사람이 진중권이다. 당시 트위터 등을 통해 진중권은 이른바 ‘그림 대작’이라는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무엇보다 ‘미학자’로서 갖고 있던 소신을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진중권에 따르면 그 사건은 한마디로 “현대미술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소극”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2018년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지금은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미학 스캔들_누구의 그림일까』는 이제는 어느덧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을 그 사건을 미학적·예술사적 차원에서 혹은 상식적 논리의 차원에서 재조명한다. 이 책의 저자 진중권은 그 사건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내상을 입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사건의 불편한 기억과 더불어 사건이 우리에게 던져준 교훈까지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진중권이 말하듯, ‘조영남 그림 대작 사건’은 한때 온 사회를 분노로 들끓게 한 부정적 사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진중권은 “이 사건을 통해 조영남은 (본의 아니게) 우리 미술계에 한 가지 중요한 의제를 던져주었다”라면서 그것이 바로 미술의 ‘현대성’modernity이라는 의제임을 강조한다. “대중은 이 사건에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창작의 정상적인 방법으로 확립된 그 관행을 여전히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진중권이 이 사안에 끼어든 세 가지 이유
― 진중권의 비판은 미술계에 대한 ‘명예훼손’이며 ‘예술모독’인가?
『미학 스캔들_누구의 그림일까』은 조영남 사건이 벌어진 직후인 2016년 7월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세 편의 기고를 우선 9장과 10장에 걸쳐 다시 정리했다. 이 부분에서는 작품의 물리적 실행을 조수에게 맡기는 관행에 대한 일반 대중의 비난과 미술계 안팎 몇몇 인사의 비판을 일일이 반박하는 가운데 현대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저자성’의 현대적 기준을 세세한 자료 제시와 더불어 저자 특유의 명쾌함으로 깔끔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11~13장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미술계 전문가들을 겨냥한 내용이다. 1심에서 조영남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지자 그동안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던 평론가, 미술이론가, 미술사학자 등이 뒤늦게 ‘진중권 비판’에 뛰어들었는데, 이들의 비판에 대한 진중권의 반박이 이 부분에 담긴 것이다. 여기서 진중권은 이른바 ‘전문가’라는 이들의 미술사 지식이 얼마나 일천하고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인지 또 작품의 저자성에 관한 이들의 논증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진중권은 이 책의 본문에서 거듭 자신이 “이 사안에 끼어든 이유”를 명확히 밝힌다. 첫째, 검찰이 무차별하게 예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대작은 관행적으로 행해져왔으며, 그렇게 제작된 작품들을 누군가가 구매했을 텐데, 그때마다 고객에게 대작 사실이 고지되지는 않았다. 이는 조영남뿐 아니라 다른 “유명 작가”도 원칙적으로 ‘사기범’으로 기소당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의미다.
둘째, 몇몇 언론에 의해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미술의 미의식이 ‘과거’의 ‘아름다움’에 고착되어 있었다면, 현대미술은 특유의 전위의식으로 사회를 ‘미래’의 새로움으로 이끌어왔다. 그런데 몇몇 언론은 대중을 타임머신에 태워 100년 전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시절 파리를 동경하던 식민지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현대미술 100년의 ‘미적 성취’ 자체를 무효화한 것이다. 예술적 실험이 동시에 사회적 혁신의 전주곡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미적 낙후성의 후과는 그저 예술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친작 숭배’가 미래 예술의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컬렉터들의 친작 숭배를 이해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미적 취향은 “종종 끔찍하다”라고 일갈하면서, 예술이 이렇게 ‘친작 페티시즘’에 영합한다면, 1960년대 이후 등장한 다양한 예술언어가 예술에서 배제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산업이 등장하는 데에도 장애가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온갖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오늘날, ‘친작’에 집착하는 것은 미학적 쇄국정책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유를 밝히면서 그는 비판자들을 향해 말한다. “나는 조영남이 조수를 사용할 ‘권리’를 옹호했지, 그가 조수를 사용한 ‘방식’까지 옹호하지는 않았다.” 진중권은 흔히 오해하듯, 대작 작가를 마구 사용한 (그리하여 도덕적으로는 얼마든지 비난받아 마땅한) 조영남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작가-조수 관계를 합리적으로 바꾸려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보자는 취지였다. 조수 사용 자체를 불법시하고 검찰에서 기소까지 하려고 덤벼든다면, 그 어떤 논의도 아예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예술의 신탁통치, ‘주리스토크라시’를 반대한다!
― 검찰의 무지와 미술계의 엘리티즘을 향한 비판
“현대미술의 규칙을 왜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제정하려 드는가?” 애초 진중권이 제기한 쟁점은 바로 이것이다. “섬세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니 “미술계 밖에서 형사재판?인민재판의 굿판을 벌일 게 아니라 미술계 안에서 윤리적?미학적 논쟁을 시작하자”라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미술계에서 이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데에 공식적 반대를 표명한 이는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 미술계(와 그들을 비롯한 예술계)는 자기들이 빗장을 풀고 진심을 다해 논의해야 할 사안을 무책임하게 사법부로 넘겼다. 대한민국 미술계가 스스로 법원에 신탁통치를 바라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진중권은 이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미술계’ 인사들을 일컬어 ‘미적 선민’이라 칭하면서, 그들이 조영남을 작가로 진지하게 받아주는 것을 “모양 빠지는 일”로 여기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미대도 안 나온 딴따라의 화투 쪼가리까지 예술이라니 고상하신 뮤즈 신의 자존심이 상하신 게다. 이는 이들만이 아니라 미술을 좀 안다는, 혹은 미술을 좀 한다는 다른 많은 이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이해가 간다. 하지만 솔직히 재수는 없다. 뒤샹과 워홀이 깨려고 한 게 그런 허위의식이었다. 베냐민은 그것을 ‘예술의 속물적 개념’이라 불렀다. 예술, 개나 소나 해도 된다. 거기에 무슨 자격이 필요한 거 아니다. 그걸 보여주려고 뒤샹은 변기에 사인을 하고, 워홀은 회화에 ‘찌라시’ 기술을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조영남을 편드는 게 모양이 좀 빠지더라도 스타일 구겨야 할 때는 구겨야 한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저 ‘조영남 편들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무지한 검찰과 미적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 미술계를 향한 합당한 비판이다.
이 책에서 여러 번 확인하는바, “현대미술 작가들은 왜 창작에서 관념과 실행을 분리”하려 한 것인가. 그건 “전통회화를 토대로 형성된 미의식이 더는 현대의 미감에 어울리지 않고 작가의 터치가 생명이라고 보는 장인적 생산이 더는 사물을 만드는 현대의 산업적 방식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관념과 실행을 분리한 덕분에 1960년대 이후의 미술 영역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됐고, 미술적 프로젝트의 스케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 것이 사실이다. 그 덕에 “오늘날 미술은 천 개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진중권은 강조한다. 관념과 실행의 분리가 없었다면 워홀을 비롯하여 현대미술을 이끄는 슈퍼스타들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토록 긴요한 문제 앞에서 미술계와 예술인과 여타의 전문가 집단은 진지한 논의도 시도해보지 않은 채 비겁하게 ‘주리스토크라시’ 아래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라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4장에서 진중권이 조영남 사건을 법적 측면에서 조망해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미술계에서 이 문제를 법원으로 들고 간 것과는 다르게, 법학계에서는 외려 이를 법만능주의(jusristocracy)로 보아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음을 지적하면서 그는 조영남 사건을 바라보는 법학계 내지 법조계의 시각을 소개한다. 그리고 1심판결과 2심판결 내용을 면밀히 비교하면서 서로 어긋나는 두 판결의 바탕에 현대미술에 대한 상이한 관념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항소심 판결은 현대미술에 대한 올바른 관념이 법원에까지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이 진중권의 시각이다.
대작 논란을 미술계의 자체적 논의로 해결하려 했다면 아마 그 자체가 한국 미술의 “고유한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갈등 해결을 맡은 담당자들의 전문성과 합리성”이 떨어지고 “합리적 제도”도 없다 보니, 결국 논의가 법정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남형두 교수는 이런 경우조차 사법부에서는 되도록 “재판을 소극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자치가 보장된 영역에 사법이 자칫 잘못 개입하거나 지나치게 개입하는 경우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예술의 퇴보를 가져오는 등 심각한 폐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리스토크라시는 실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미성숙의 증거다. 독일에서도 근대화의 초기에는 시민들이 툭하면 사안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일상의 “법정화”(tribunalisieren) 현상이 빚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법조계까지 미술계 안에서 해결하라고 권하는 문제를 정작 미술계는 법정으로 가져갔다. 더욱이 대한민국 미술계가 조영남에 대한 기소를 묵인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왜곡된 사실과 논리로 검찰의 기소 논리를 지원했고, 심지어 법정에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11개 미술가단체에서는 별도로 조영남을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했다. 이 건은 2016년 법원에서 각하 처분을 받았다. - 본문 370쪽, [14장 예술의 신탁통치, 주리스토크라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