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심은 예술가에게(혹은 개인에게) 소중한 자산이지만,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연주자는 그 직업적 특성상 다른 사람의 발상에 맞춰 미묘하고도 이례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굽히고 일그러뜨려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하필 광선처럼 날카로운 집중력과 전적인 자유분방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베토벤의 음악에 뛰어든 것일까? 달리 말해 나는 왜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광기로 몰아갔을까?
(...)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매혹이라는 감정이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으며, 대체로 위험의 요소를 동반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잃는 길이기 때문에 타인과, 아이디어와,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
--- p.13~14, 「베토벤의 그림자」 중에서
원래 연주자가 되려면 자신감 이상의 그 무엇이, 일종의 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해석으로 청중을 주목을 휘어잡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의심’보다 더 강력한 자질, 청중의 마음을 더 크게 흔드는 자질은 없다(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연주자가 해답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제기하는 질문을 들을 수 있어서 그에게 끌린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 제르킨은 자신의 내면이 들은 소리를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통제력을 손에 넣고자 끈질기게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연주가 전하는 것은 그 노력을 통해 얻은 통제력이 아니라, 경외심에 차 바라보는 음악의 경이로움이다. 내가 가장 감탄하는 것은 그의 통제력이지만, 그의 연주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경이로움이다.
--- p.47~48, 「베토벤의 그림자」 중에서
지금 나는 극단적으로 내밀한, 사적인 단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대화의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에게 말하는 것이 있고, 몇몇 사람에게만 말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그리고 어쩌면 정신 치료사)에게만 말하는 것, 혹은 스스로에게만 말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스스로에게조차 털어놓지 않는 것이 있다. 슈만의 음악은 바로 그런 수준에서 작동한다. 그는 곡을 쓸 때마다 자신의 깊은 곳으로 손을 뻗어 가장 모호하게 숨겨져 있는 것을 찾아내려 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의 모호함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이것은 소중하고 희귀한 특징이다. 동시에 지독히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유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건강한 행위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적으로 응시하는 것은, 자신의 유약함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고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슈만은 바로 그런 일을 한다.
--- p.113~114, 「은밀한 청자를 위하여」 중에서
나는 〈여인의 사랑과 생애〉를 들을 때 내가 듣는 것이 슈만 자신의 소멸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다른 음악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슈만의 뒤를 따라 무서운 복도를 걷는 것이다. 그 경험이 좋든 싫든 나는 결코 이를 주저하지 않았다. 슈만을 연주할 때면 그 곡의 정서적 의미에 밀착되는 기분이 들면서 온몸의 화학적 성질이 바뀐다. 음악을 통해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우며 망가진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알고 싶다. 이런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 p.115~116, 「은밀한 청자를 위하여」 중에서
음악은 맨 처음 생겨날 때부터 일종의 언어와 같았다. 항상 문법과 억양과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음악이 일기가 된 것은 슈만에 와서 일어난 일이다. 그에 이르러 음악이 이전보다 훨씬 풍부해졌다거나 의미를 더 많이 부여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낫다. 슈만은 음악을 구원이자 생명줄로 삼은 첫 번째 작곡가라고. 그에게는 오직 음악만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의 형식이어서, 즉 자신의 유일한 목소리여서 음악을 작곡했다. 〈크라이슬러리아나〉에 담긴 열정, 시정, 공포는 그의 삶에 부록처럼 주어진 요소들이 아니었다. 음악은 그의 삶의 경험 자체였다.
--- p.154~155, 「은밀한 청자를 위하여」 중에서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인식한다. 역설적이게도 ‘외로움’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음악가들은 매일의 삶과 작업 속에서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외로움’의 경험은 우리의 연주에서 드러나고, 많은 경우, 우리가 왜 연주하는지를 말해준다. 감히 말하건대, 피아니스트들은 다른 어떤 음악가보다도 이런 현실을 더 많이 떠안고 살아간다. 수없이 많은 위대한 음악들을 혼자서 연주하기 위해 정신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자신의 머리와 가슴 안에서 보내는 음악가는 오로지 피아니스트뿐이다. 그토록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슈만에게 단순한 이해와 애정을 넘어 각별한 애착을 느끼는 이유는 ─슈만의 피아노곡의 탁월함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고립감 때문일 것이다. 완전히 외로운 우리의 일부. 이것이 슈만이 음악적 일기를 작곡하면서 고심했던 부분이다. 그는 외로움을 다룰 때는 얼버무리거나 포장을 하지 않는다. 그의 내밀함Innigkeit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상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다.
--- p.156~157, 「은밀한 청자를 위하여」 중에서
그 얼마 전에 나는 C장조로 마무리한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를 접한 바 있었다. 거기서 베토벤은 마지막에 장장 스물아홉 개의 C장조 화음을 울려댔다. 교향곡 5번의 경우처럼 작품의 궤적이 어둠에서 빛으로 향할 때는 이런 경향이 터무니없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장대한 해결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건반을 자유롭게 가로지른 곡은 개시부에 나왔던 성가풍의 선율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음악이 마지막으로 혼을 불태운 다음, 어쩔 수 없이 최종 종지로 접어드는 것을 들었다. 희미한 C장조 박동이 한 번, 다시 한 번, 또다시 한 번 들렸다. 나는 네 번째를 기다렸다.
들려오지 않았다.
C장조 화음은 세 번째가 마지막이었다. 요란한 팡파르도, 확장도, 끝났다는 느낌을 주는 그 어떤 제스처도 없었다. 그냥 끝이었다. 이 소나타는 결말을 맺는 대신 공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지만, 멈췄던 숨을 크게 내뱉을 수는 있었다.
나는 죽음을 들었던 것이다.
--- p.186~187, 「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