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책을 처음 구상하게 된 계기는 나, ‘엘리’를 위해서였다. 현재의 나는 사회적·경제적·개인적 이유들로 인해 비혼을 굳게 다짐했지만,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마따나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다양한 변수(ex. 호르몬의 농간, 환경의 변화 등)에 이 다짐이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외로워서’, ‘혼자 나이 드는 것이 두려워서’, ‘경제적인 문제로’, ‘주변 사람들이 다 결혼할 때 나만 안 하면 이상해 보이니까’ 등의 이유로만 덜컥 기혼을 선망하게 되는 회피형 기혼 선망자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두려움이 특정 행위(결혼)의 동기로 작용한다니, 이건 정말 포식자가 쫓아오는 것이 두렵다고 사막 모래에 고개를 처박는 타조와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제정신 멀쩡(?)할 때의 내가 최대한 이성적인 사고로 적어내려간 문장, 이른바 비상 작동 중지(Emergency Stop) 버튼이 필요했고, 이 책을 쓰게 됐다. 다분히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된 글쓰기였으나,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또는 놓일지도 모르는 동지들을 위해 그들의 멘탈에도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 버튼을 공유한다.
--- p.11~12 「프롤로그」 중에서
주변에 좋은 남편과 사적인 영역에서의 형평성을 이루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며 잘살고 있는 사례도 충분히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끊임없는 설득과 토론을 통해 쟁취한 결과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결혼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버렸다. 누군가 운이 좋아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데 성공했더라도 그것이 곧 모든 여성이 ‘하지 않을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 사안이 ‘전부 그러한가’, ‘전부 그렇지 않은가’로 귀결되는 흑백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한쪽에서 특정 권리를 포기한 만큼 다른 쪽에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ex. 안정감이나 소속감 같은 것들)를 줄 수도 있는 데다가, 때에 따라서는 아주 긴밀한 상호 호혜적 관계를 이룰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 내가 바깥일을 하며 돈을 벌어오니 네가 집안일은 전담하라는 식으로 나눌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저 투쟁과 반항, 그리고 협상을 통해서만 특정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비뚜름한 형평성 게임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 긴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과연 내 남은 인생에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를 따져봤을 때 나오는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않은 탓도 있다. 차라리 그 시간과 열정으로 주식 공부를 더 해서 시드나 불려놓는 게 더 이로울지도.
--- p.20~21 「PART 1_나 하나 키우기에도 충분한 삶」 중에서
만약 내가 5살 때 이와 같은 서사의 동화나 만화를 접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대만 총통과 엘사를 알았다면 내 꿈은 ‘좋은 엄마’가 아니라 한 나라의 총통이거나, 자유로운 탐험가이거나, 고고학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제 한층 더 다양해진 스토리텔링 채널과 콘텐츠들 덕분에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물론 나도 그 혜택을 담뿍 누리고 있다. 어떻게 누리고 있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지들을 쉽고 빠르게 알아보고, 또 그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교류할 수 있게 됐다! 이 험난한 세상길, 혼자 걷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고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더욱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누구를? 야망 넘치는 비혼 원정대들을!
--- p.52 「PART 1_나 하나 키우기에도 충분한 삶」 중에서
아무렴 뭐 어때.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아침부터 잠드는 그 순간까지 완벽히 나만을 위해 꾸려지고 채워지는 하루하루가 만족스럽기 그지없다는데. 요즘처럼 글쓰기가 재밌고(잘 쓰건 말건), 그림 그리는 게 재밌고, 운동하는 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진짜다. 여기에 진짜라는 말을 몇 번째 쓰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는 진실한 표현이자 문장이다. 솔직히 혼자 보내기에도 하루가 정말 짧다.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영화, 듣고 싶은 노래, 그리고 싶은 그림은 많은데 하루가 저무는 것이 아까울 정도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에게는 이 적막과 고요, 그리고 여유가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다고. 이것들이야말로 요새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니까.
--- p.84~85 「PART 2_외로워도 슬퍼도 홀로 멋지게 사는 법」 중에서
어쨌거나 내가 겁 없고, 싹수없는 데다 개념까지 없는 3무(無) 인간이 된 데에는 딱 한 가지 공통적인 배경이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손전등을 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다들 그렇게 살아.”
지금 당장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둘이 된다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아이가 생기면 모성애가 자동으로 우러나오는 걸까? 만약 영화 〈케인에 대하여〉처럼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엄마가 된다면? 또 ‘정상’이란 범주에 나를 끼워 맞추기 위해 홀로 발버둥 쳐야 하겠지. 생각이 너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남들이 생각하는 대로 맞춰 사는 수밖에 없는 데도? 그건 손전등이 아니라 가이드라인이잖아.
언젠가 이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자유로운 삶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세상의 잣대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고, 마음이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른 자유로운 삶은 사랑받는다. 그리고 상쾌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홀로서기를 하는 인생이 불안정하고 고독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자유는 아깝다. 그리고 나 같은 개별자들의 점들을 이어 새로운 그림을 그려가다 보면 또 어딘가에서 새로운 교집합을 만들어 무궁무진한 파문을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으로 오늘도 나는 내 멋대로 손전등을 휘두르며 이 세상을 무대 삼아 훨훨 날아오른다, 훨훨!
--- p.132~133 「PART 2_외로워도 슬퍼도 홀로 멋지게 사는 법」 중에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1인 가구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첩첩산중이다. 물론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요행이나 운(금수저, 은수저 등)에 기대지 않고도 ‘비혼 1인 가구’를 누구나 쉽게 엄두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우리가 크고 작게나마 지속해서 내고 있는 의견과 목소리가 아닐까 한다. 우리 세대뿐이 아니라 우리 다음 그리고 또 다다음 비혼 세대를 위해서 우리 비혼 지향 가구들은 영리하고 독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자기만의 방을 쟁취하고 끊임없이 해당 안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소수의 안건이 아닌 사회적 안건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 p.182 「PART 3_지속 가능한 비혼 라이프를 위하여」 중에서
그렇게 된 것은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결혼과 출산을 가능한 한 유예하자. 불행의 냄새를 모르는 자, 가난과 외로움의 냄새를 맡아본 적 없는 자,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묵상해보지 않은 이들만 유예를 중단토록 하자. 불합리와 불평등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본 경험이 없는 자, 슬픔의 마취제를 찾아다니지 않았던 그런 자들만이 가담하도록 하자. 그러한 자들이 이 세상에, 대한민국 땅에 존재한다면 말이다. 세상에 생명을 얻고 태어나 상처받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리하여도 좋다. 정신과 영혼에 피멍이 들고 멍울이 잡혀보지 않았다면.
--- p.216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