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한국의 문화재와 근현대 미술품을 한자리에서 감상?비교하여, 동시대 안에서 생동하는 과거와 현재의 한국 미를 총체적으로 조감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선구적으로 한국의 미에 대해 언급했던 고유섭(1905~1944), 최순우(1916~1984), 김용준(1904~1967) 등의 한국미론에 기반하여 한국의 문화재를 특징짓는 열 개의 테마를 선정한 뒤 한국 근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추적했다. 이는 또한 20세기 미술에서 ‘전통(tradition)’을 어떻게 개념하고 인식하고 재현했는가 하는 중요한 명제를 살펴보는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 p.11, 「기획의 글: 한국미술,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배원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중에서
한국 근대 미술 전통론은 한국미술의 특색에 대한 담론으로 대부분 역사에서 원형을 찾으려는 시도였으며 역사, 문화 의식에 따라 원형의 시점이 달리 설정되었다.(…) 전통 인식은 유동적이며 정서적인 요인이 많이 작용한다고 하겠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적 국가의식과 민족주의를 근간으로 역사, 문학, 미술 등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영토 개념은 역사 인식의 중요 논제였다. 영토의 경계가 유동적이던 조선상고사가 관심을 끌게 되었고, 미술계에서도 고대에서 원형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또한 고구려부터 조선 말까지 중국 대륙을 매개로 문화 요소들을 도입하던 상황에서 미술도 중국과의 교류 상황이 전통을 설정하는 데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그리고 여기에 일제 관학자나 지식인들의 역사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고유섭(1905~1944), 윤희순(1902~1947), 김용준(1904~1967) 세 미술사가·비평가의 글을 중심으로 그들이 탐색한 한국 근대 미술의 전통론을 시대별·논제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 p.50, 「논고: 20세기 전반 한국미술의 전통 인식과 전승 문제」, 정형민(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중에서
전통은 한국 근현대미술 형성의 요체였다고 할 수 있다. 미술가들은 서구를 대면하면서부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서구 문물과 접하기 이전의 것을 우리의 전통으로 인식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시대마다 미술가들이 전통으로 인식한 대상이 다르고, 동시대라 하더라도 세대에 따라 전통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시인 문덕수(1928~2020)는 일찍이 전통과 관련해 “취사선택, 순응과 거부, 평가와 배제 등 복잡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선택된 전통은 세계관이요 질서요 가치”라고 언급했는데, 이처럼 미술가들이 특정 전통을 선택하는 그 자체가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자 역사성을 획득하는 행위였다. 이 글에서는 1950~1960년대 미술가들이 어떠한 전통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 p.218, 「논고: 한국적 정체성 확립의 준거틀로서의 전통:1950~1960년대 한국미술가들을 중심으로」, 김이순(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 중에서
전통이란 오랜 기간을 거치는 동안 살아남은 의미 있는 현상으로 그 민족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가나 정부는 교체되거나 없어질 수도 있지만 전통은 사라지지 않는 본질을 의미한다. 그런데 시대와 사회가 변함에 따라 새로운 요소가 첨가될 수도 있고 전통을 해석하는 시각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전통은 반드시 고정적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이다. 전통은 단일한 것, 획일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한 각도에서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 전통은 한편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영감을 주는 근본이기도 하다. 새로운 미술은 그 이전의 문화나 전통을 계승하거나 반발하면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신고전주의 미술이 전통을 계승한 운동이라면 그 후의 모더니즘 미술과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전통을 배척하면서 현대미술을 탄생시켰다.
--- p.374, 「논고: 전통과 그 시대적 공감: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미술」, 김영나(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중에서
근대국가 설립 이후, 과연 전통은 한 국가의 역사적 표상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기호학적이든 의미론적이든 한국현대미술과 전통의 관계는 역사적인 관점보다는 오히려 ‘정체성’의 관점에서 더욱 두드러졌다고 여겨진다. 특히 1990년대 한국미술은 정치적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의 쇠퇴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의 미술 현장으로 침투하던 시기다. 근대 이후 한국미술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이 연속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아마도 20세기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대부분의 근대국가는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어색한 동거, 민족주의와 세계화 사이의 갈등은 불연속적으로 전개된다. 그 동안 역사는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불변의 진실을 추구했으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역사의 서술을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 사이에서 형성되는 지식으로 본다. 푸코는 역사가 지속적인 주석 달기를 통해 연속적인 지식으로 객관화된다는 믿음을 만들어 낸다고 하며, 역사 연구는 각 시대의 살아 있는 언어(enonce), 언표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사는 고정되지도 연속적인 것도 아닌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사건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 p.558, 「논고: 1990년대 이후 전통에 대한 인식」, 정현(인하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