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등장하는 예수는 매우 영적이며 동시에 매우 정치적이다. 하나님 영과의 관계가 그의 삶의 중심적 실재, 즉 존재의 근원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영적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와 영의 세계와의 관계를 최대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예수를 일별할 수 없다. 예수가 속해 있던 전통의 주된 흐름이, 그 구체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반영하는 공동체를 역사 속에 세우는 일에 관심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었다면, 예수도 또한 정치적이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예수의 하나님과 그의 전통에 의미가 있다.
--- 「머리글」 중에서
마커스 보그의 책은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언어를 통해 예수를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정교한 논리로 예수 운동을 변증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도 신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신학의 언어, 신앙의 언어가 상투어처럼 변한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 상투어로 변했다는 말은 그 언어가 사건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들려준 비유들에는 종교적인 언어가 담겨 있지 않다. 일상적 언어를 통해 비상한 세계를 보였다. 마커스 보그의 책은 일상의 언어로 신학적 담론을 생산하려는 많은 이들에게 전범이 될 수 있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예수는 영적이면서 지적인 인물이기에 중요하다. 실제로 그는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많은 것에 도전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관심사 이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되는 것이고, 그가 신중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연구이긴 하지만, 예수라는 인물이 여러 세대의 기독교인에게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또 예수가 교회 생활과 문화생활 속에서 지속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을 마음에 담고 이 책은 예수의 비전, 즉 우리에게 대안적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통찰들을 밝히려 노력할 것이다.
--- 「1장 도입(토대 다지기): 예수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 」 중에서
영의 세계와 예수의 밀접한 관계는 우리로 하여 역사적인 인물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사람들이 예수를 선포할 때 사용한 칭호들의 근원과 적합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부활 사건은 예수의 추종자들로 하여 당대의 문화 속에서 가장 영예스러운 용어로 예수를 그리게 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의 이런 선포의 맹아는 역사적 예수의 체험이었다. 비록 충분히 자라난 식물이 꽃을 피우기 위해 부활이라는 체험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공관복음서가 만들어낸 누적된 인상, 즉 이스라엘의 시작까지 소급되는 유대교 카리스마 전통 속에 예수가 서 있다는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마태와 마가 그리고 누가복음은 한결같이 예수를 영으로 충만한 사람, 영적인 힘을 분출하는 사람으로 그린다. 영과 예수의 관계는 그가 기도했던 선교의 근원이요 에너지였다.
--- 「3장 예수의 영으로 충만한 체험」 중에서
예수가 살았던 세대는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세대가 특별히 호전적이었다거나, ‘폭력적인 사람들’이 그 세대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두 가지였다. 먼저, 실제적인 불의에 대한 지각이 있었다. 로마의 통치는 만성적으로 압제적이고도 잔인했던 것 같다. 그리고 깊이 각인한 삶의 방식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분리로 이해할 수 있는 거룩의 에토스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 「5장 예수의 사회적 세계 유대」 중에서
적어도 분명한 것은 예수가 인습적인 지혜가 가르치는 의와 번영 사이의 상관관계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이 상관관계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은 옳게 살지 못한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쓸모없는’ 자녀들이다. 게다가 문화의 척도라는 것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 속에서 내면화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쓸모없는 자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수는 가난한 자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난한 자들이 스스로 달리 인식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이것은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한 데서 나타난 것과 똑같은 역동적 행위였다.
--- 「7장 예수: 재활성화 운동의 창시자」 중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사회적 세계의 정점에서 볼 때 예수는 분명히 잘못됐다. 예수는 사회의 현상 질서를 고발하고 다른 질서를 옹호했다. 그들은 사회 변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와 사회의 현상 질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로마와의 관계를 현재 수준에서 유지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대제사장을 위시한 친외세분자들에게 평화의 길은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의로움, 정결함, 명예와 지위가 문제 되지 않는 생명의 길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복음이었고 부자들에게는 재난이었다. 그것은 문화적 관습들에 대한 사람들의 충성심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또한, 예수 운동은 아웃캐스트를 받아들였다. 이 모든 것이 당시의 인습적인 지혜에 도전이 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공공질서에 대한 위협일 뿐만 아니라 아주 질 나쁜 사람이었다.
--- 「9장 도전으로서의 예수: 예루살렘과 죽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