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아내고 마련하는 행위다. 한 사회의 알아내려는 의지와 마련하려는 의지가 사람과 물질과 제도를 통해 구현된 것이 과학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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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자를 빠르게 찾아내는 나라이면서 약 20년 동안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사망한 사람이 몇 명인지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2015년 메르스 사태의 교훈을 코로나19 대응에 활용할 줄 아는 나라이지만, 2018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 씨가 기계에 끼어 사망한 일을 두고 특별조사위를 만들어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다짐했음에도 2020년 9월 같은 곳에서 또 사람이 죽게 만드는 나라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여전한데, 우리는 가끔씩만 현명하게 대응하고 대개는 실패를 반복한다. ‘케이 방역’의 성공 뒤에서 더 많은 ‘케이 재난’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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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기, 헬기, 엘리베이터, 소방차, 구급차, 버스를 왜 만들었는지 이번 4월에는 이해할 수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 결국 사람을 살린 것은 자기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 해야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어둠 속에서 믿고 있는 이들을 배반하지 않은 사람들 덕분에 이번 4월에는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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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보고서’는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작업자 과실론’을 꼼꼼하게 논박한다. (...)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기계장치와 인간, 화학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서 위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구조하에서 작동하는 기계와 투입되는 노동력, 특정 구조하에서 사용되는 화학 물질과 인간의 관계가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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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높이 5미터가 안 되는 곳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현상은 일차적으로 간단한 물리적 계산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원인을 밝혀내고 제거하는 것은 물리학 바깥으로 나가야만 가능하다. ‘집단 사망의 과학’은 개별 사망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밝히는 데 필요한 과학만이 아니라 사망의 규모, 사망의 패턴, 사망의 사회적 결과를 함께 밝히는 과학, 이른바 ‘융합’ 과학이다. 공사장에서 일하던 그들은 왜 떨어지는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그들은 왜 숨을 쉬지 못하는가. 가장 쉬우면서 가장 어려운 이 문제를 우리는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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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여기는 살 만한 곳인가요?” 과학과 정치가 함께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지구에 큰 재앙이 닥쳐 인류가 살지 못할 곳이 되면 우리의 선택은 태양계에서 그나마 가장 살 만한 곳인 화성으로 가는 것이라는 머스크의 주장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버리고 떠나자는 말을 무조건 환영할 수는 없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들에게 과학과 정치는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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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살 만한 곳에서 조금 더 나은 과학을 실천하고, 그 과학이 다시 조금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내는 선순환 속에서 과학과 정치는 서로를 이롭게 할 수 있다. 과학을 통해 또 정치를 통해 살 만한 곳을 만드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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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을 확인하고 인간의 조건을 향상하는 과학기술, 헌법에 담을 만하고 헌법에 어울리는 과학기술은 더 보편적인 지향을 가진 인간적 행위로서 경제 발전의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헌법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자리를 재고하자는 주장은 단지 과학기술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과학기술을 통해서 현재의 상태를 성찰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으며, 과학기술도 한국 사회를 통해서 그 보편적인 가치를 확인하고 실현할 수 있음을 인정하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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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시민 모두의 교양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으면서 동시에 가치중립적일 수는 없다. 교양은 가치중립적인 정보의 집합이 아니다. 한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쌓여서 표출되는 것이다. 교양은 단지 전문 지식을 쉽게 풀어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밑천으로 하여 가치 있는 사회적 삶을 꾸려나가는 경험을 통해서 축적되고 확장된다. 4대강과 원전에서 인공지능과 기후변화까지, 과학의 문제를 푸는 것은 곧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테크니컬'한 과학만으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가치를 품은 과학'이라는 교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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