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적어도 우리 스튜디오에서는, 고전적인 촬영보다 컴퓨터그래픽이 더 싸졌어요. 촬영 로케이션을 잡고, 수많은 사람의 일정을 조율하고, 감독의 구질구질한 예술적 자아 때문에 밤늦게까지 똑같은 장면을 찍고 또 찍고, 그렇게 열심히 찍은 물건들이 포스트 프로덕션 중에 반토막이 나고… 다 헛짓거리죠. 앞으로 우리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컴퓨터로 만들 거예요. ‘진짜로 찍은’ 것과 구분할 수 없을 거예요. --- p.25~26, 「대리자들」 중에서
“나도, 강도영 너처럼 명배우가 될 거야.”
그 말이 도영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도영은 충동적으로 나영을 떨쳐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나영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희박한 공간이었지만, 나영이 의아해하고 있다는 것을 도영은 느꼈다. 말해야 했다. 언제까지 오해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좋다, 이 시트러스 향이 마지막이어도 더 이상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 p.62, 「대리자들」 중에서
물론 아직 나영에게 완전히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솔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자신의 기만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두통을 견디고 멍하니 앉아서, 무대 저편에서 나영이 재잘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지만 무엇인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 p.65~66, 「대리자들」 중에서
대학에 갈 때 즈음해서 저는 우주비행사라는 꿈을 공식적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걸 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꿈이라고 한다면 응당 이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네요. 그 꿈은 제게 천문학과 항공우주기술에 대한 좀 집착적인 애호만을 남겼답니다. --- p.71,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중에서
이렇게 광막한 우주에 사람이 빌붙어 살아갈 지구도 있는데, 어떻게 이 수많은 회사 중 제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어요. 무슨 그런 생각을 다 했냐고요? 원래 사람은 자기 인생은 뭔가 특별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일이 있을 거라고, 자기가 망하지는 않을 거라고 내심 기대하잖아요. 그리고 인생은 그 기대가 조각나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이죠. --- p.72,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중에서
우리가 돈을 벌어 먹고사는 것도 별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요. 그래도 꾸밈을 좀 과장해서 하는 건 뭐 어때요? 저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우주문명의 첨병에 선 회사에서 일하는 거예요.
물론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얼레벌레 살아가고, 자기가 원 하는 게 뭔지도 몰라요. 그러니 헛소리가 확실하더라도 할 수 있다고 그냥 떠벌리는 편이 더 낫겠다 싶었어요. --- p.96,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중에서
그렇다. 실피움은 제국과 닮았다. 제국의 각 권역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제국은 웅장한 하나의 국체를 이룬다. 실피움 또한 통합을 통해 한 행성의 생태계를 통째로 독식하는 데 성공했다. 제 국의 중심인 태양계에서 황제의 뜻이 퍼져나가듯 실피움의 뇌가 품는 뜻은 말단 전체로 퍼진다.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공포도 불안도 아니었다. 희열이었다. 표본을 채취하지 않고, 천천히 탐사정을 돌렸다. 막 속에 둘러싸인 뇌는 매우 연약해 보였다. 나는 이 아름다운 생물을 해하고 싶지 않았다. --- p.136, 「문명의 사도」 중에서
그러나 그런 부차적인 문제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황제로부터 지켜야 했다. 내가 추구하는 제국의 이상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문명의 사도로서 제국의 이상을 유지해야 했다. 반물질 어뢰가 발사되기 전에 정거장의 격납고로 향했다. 그곳에는 태양계로 소식을 전할 때 쓰는 파발선이 한 대 있었다. 파발선을 타고 릴레이 스테이션으로 가속했다. --- p.144, 「문명의 사도」 중에서
은하수의 광채, 그리고 그 광채마저 집어삼킬 것처럼 막막한 심연이 보였다. 그 심연을 배경으로 떠 있는 인공물, 토성을 연상시키는 고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고리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계였다. 항성의 빛을 받지 못하는 고리의 한쪽 면은 어두웠다. 고리의 빛을 받지 않는 면은, 배경으로 마땅히 있어야 할 별의 부재로만 인식할 수 있었다. 웜홀 릴레이 스테이션이었다.
꽤 자주 보아온 것인데도, 그 광경의 비현실성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 p.145, 「문명의 사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