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나는 카메라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배경을 보았다. 어느 사람 뒤에는 벽을 가득 채운 책장이 있었고 또 다른 사람 뒤에는 모던한 그림 액자가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의 뒤에는 은은한 빛이 도는 스탠드와 컬러풀한 소파가 있었다. 나는 그 배경을 보면서 자주 그것들을 부러워했다. 누군가의 뒤를 채우는 교양과 우아, 그리고 안목과 재력을.
--- p.35~36 「박사랑, 빈 벽을 찾아서」 중에서
가족의 휴식과 안정을 위해 노력할수록 나는 불편하고 불안정해졌다. 엄마 내 택배 어디 있어? 여보 장볼 때 아이스크림도 사 와, 온라인 수업이 연결 안 돼, 밖에 누구 왔나 봐, 샤프가 없어졌어, 마데카솔 여기 뒀었는데, 엄마, 여보.
식구들은 나 역시 집의 일부라고 느끼는 듯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꺼내는 컵이나, 먼지 앉은 바닥을 쓸어내는 청소기나, 심심하면 트는 텔레비전처럼, 집 어딘가에 있는 유용한 무엇. 그들에게 나는 집이 되어갔고, 내가 머물 공간은 사라졌다.
--- p.58~59 「김산아, 작고 청승맞은 나의 우주」 중에서
이 모든 걸 코로나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까. 코로나 때문에, 하고 말하면 이해되지 않는 게, 용인되지 않는 게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하고 말하면 남들과 비슷한 수준의, 남들과 다르지 않은 정도의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하고 말하면 다른 건 다 이유가 되지 않으니까, 다른 건 다 별거 아닌 게 되었으니까 그러므로 모든 건 다 견딜 만하고 감당할 만한 것들이 되었다.
코로나는 나에게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내 삶의 제약도 코로나 때문이면 좋겠다. 내 삶의 무게도 코로나 때문이면 참 좋겠다. 지나가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었으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각자라도 품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것이 터무니없는 코로나 예찬일 리 없다. 코로나 때문이다. 아니다,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다.
--- p.113 「최지애, 코로나 때문에」 중에서
하지만 아이를 이해시키는 방법은 인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뿐. 아이와 계속 연습하며 1미터라는 거리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결코 가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아직 작은 몸과 작은 세계를 가진 아이에게는 더 크게 느껴질 것이 당연했다. 나는 지난 시절 나의 반경 1미터의 공간을 채웠던 것들?이젠 기억나지 않을 만큼 사소할 테지만 그것들은 대개 친밀하고 다정하며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들이 분명하다?과 앞으로 내 아이의 반경 1미터의 공간을 채워나갈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 p.122~123 「김은, 반경 1미터의 삶」 중에서
다시 들여다본 페이스북의 오늘의 키스 사진에는 ‘좋아요’ 수가 늘어났다. ‘좋아요’를 누른 전 세계 사람들은 무엇이 좋았던 걸까. 기사에 따르면 프랑스 방역 당국은 모든 필수적이지 않은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테면 식료품점은 열고, 미술관이나 영화관은 문을 닫았다. 키스도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파리 시네마테크는 페이스북을 통해 키스가 필수적이고 본질적이라는 걸 잊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이미지는 언제고 알려준다. 그것?만남, 접촉, 키스?은 가능하다는 것, 그 순간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영화는 늘 그랬다. 언제고 그 시절로 돌아가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았던가.
--- p.148~149 「장재희, 잊지 마세요」 중에서
해로운 생각은 일단 치우자.
사람들은 늘 회복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만 삶은 대부분 작고 하찮은 파멸의 이야기다. 때문에 그것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정신적 안전을 위해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렇게 몰아가서도 안 된다.’
--- p.185 「신주희, 코로나44 극복기」 중에서
앞으로 누군가 생일을 물어오면,?나는 오늘의 이 기억을 떠올릴?것이다.?그리고 말할 것이다.?그때는 다들?마스크를 쓰고 있었다고.?우리 잘못이 아닌 일로 오래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고.?어쩌면 나는 더 오래된 마스크를 평생 쓰고 살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그러니?당신도 혹시 그렇다면,?더는?당신 잘못이 아닌 일로 벌을 받는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그렇게 말하며 우리는 웃을 것이다.?마스크 없이 마주 앉아 환하게 웃을 것이다.
--- p.238 「한숙현, 약속」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