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좋게 깎은 연필을 필통 속에 잘 넣어두고 다시 새것을 꺼내 깎기 시작했다. 일이 손에 안 잡히거나, 왠지 마음이 들뜨고 심란할 때면 연필 몇 자루를 깎는 게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칼끝에서 밀려나가는 가느다란 나뭇결을 쳐다보는 게 좋았고, 검은 흑연을 사각사각 갈아내는 감촉도 좋았다. 세월이 흘러도 어린 시절 맡았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연필 깎을 때 연하게 풍겨오는 나무 냄새도 마음에 들었다.
--- p.10
교보문고에서 나와 인사동 쪽으로 방향을 잡고, 종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길가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10년 넘게 낯익은 거리. 스무 살 때 고향을 떠나 상경한 후로, 광화문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진솔은 얼마나 많이 걸었던가. 서울에 정이 안 붙어 무작정 정들 때까지 걸어보자 하고서 다녔던 길이었다.
--- p.28
불쑥 건이 말했다.
“그런데 말예요.”
진솔은 그를 쳐다보며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시, 어땠어요?”
한순간 멍하다 진솔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건도 웃고 있었다. 왠지 그녀의 기분이 갑자기 밝아졌다.
“좋게 얘기해요, 솔직히 얘기해요?”
“두 가지 버전으로 다 말해봐요.”
--- p.44
“난 종점이란 말이 좋아요. 몇 년 전에 버스 종점 동네에서 산 적도 있었는데, 누가 물어보면 ‘157번 종점에 살아요’ 그렇게 대답했죠.”
“종점? 막다른 곳까지 가보자, 이런 거?”
“아니, 그런 거보다는… 그냥 맘 편한 느낌. 막차 버스에서 졸아도 안심이 되고, 맘 놓고 있어도 정류장 놓칠 걱정 없이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다는… 그런 느낌요.”
--- p.106
“당신, 파울이야.”
그의 말이 따끔따끔한 파편이 되어 그녀에게 아프게 박혔다.
“미안해요. 괜히 아는 척했다면….”
“아니, 사과할 거 없어요. 실은.” 건은 고개를 저으며 온화하게 말했다.
“…당신이 알게 되길 은연중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난 뭐랄까… 어쩐지 용량이 꽉 차버린 느낌이어서, 사람도 그게 가능하다면 한 번쯤 포맷되고 싶다는 생각 가끔 해요. 깨끗하게 가슴 탁 트이면서 숨 쉴 수 있게.”
--- p.170
“당신 나쁜 점이 뭔 줄 알아요?”
“…뭔데요.”
“사람한테 마음 안 주는 거. 울타리 튼튼하게 둘러치고 속내 안 보여주는 거.”
--- p.208
진솔은 잠든 그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살짝 스쳐보기도 했다. 이건 꿈일까 아닐까. 난 깨어난 걸까 잠의 연장일까…. 5분만. 아니 10분만, 이 남자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앞방으로 건너가야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미웠다 고왔다 하는 남자. 가늘게 치지직거리는 텔레비전 소리에 섞여 뒤뜰에서 귀뚜라미 같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창문 너머 들려왔다. 산을 타고 불어와 덜컹덜컹 창을 두드리는 밤바람도.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도 작은 풀벌레 한 마리가 끊임없이 속삭이는 밤이었다.
--- p.234
“왜 당신은, 당신 얘기를 안 해요?”
건너오는 물음에 진솔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물어본 적 없었으니까.”
“지금 묻는 거예요.”
따스한 가을 햇살이 그의 어깨에 머무르는 것을, 부드러운 웃음이 그의 입가를 스쳐 가는 것을 진솔은 아릿하게 지켜보았다. 손을 내밀면 닿을 것 같은 햇살이었다
--- p.240
그들은 정자 계단참에 걸터앉아 쉬었다. 맞은편 대전의 누각이 그들이 앉은 자리에서 한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그 순간 진솔에게는 어디선가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데자뷔일까. 윤회란 것을 언뜻 믿기는 힘들었지만 언젠가 본 듯한 낯익고도 묘한 느낌에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이런 곳에 오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건 그 때문인 거 같아요. 살면서 아등바등 힘든 거, 이루지 못해서 속상했던 거 생각해보면… 어쩌면 다음 생이 있을 거야. 다음 생에선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 것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런 위안이 되거든요, 난.”
--- p.260
“좋은 사랑 할 거예요. 사랑해서 슬프고, 사랑해서 아파 죽을 것 같은 거 말고… 즐거운 사랑 할 거예요. 처음부터 애초에 나만을 봐주는 그런 사랑이요.”
--- p.363
“나 사랑하는 게 정말 힘들면… 사랑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한테 아무 위로도 못 됐다는 거 아니까.”
“도망가지만 말아요, 내 인생에서.”
--- p.418
“당신 말이 맞아. 나,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고… 내가 한 여자의 쓸쓸함을 모조리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아. 내가 옆에 있어도 당신은 외로울 수 있고, 우울할 수도 있을 거예요. 사는 데 사랑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 그런데….”
“내내 당신만 생각났어. 뛰쳐나와서 당신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 p.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