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의 정서는 자기도취(narcissism)보다 자기중심주의(solipsism)가 대세였다. 도덕성을 판단하거나 생활 방식을 트집 잡아 생면부지의 남을 비판하는 것은 주제넘고 무례하다고 인식되었다. 대신 스스로 불행하다 싶은 사람은 그저 어깨 한 번 으쓱하고 자신의 불행을 체념하듯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모호한 좌절감은 썩 나쁘지 않았다.
--- p.25 「1장_쿨함이 세상의 전부였을 때」중에서
록의 표현 방식에 반항, 계시, 나아가 혁신을 통해 변혁을 일으킬 힘이 있다는 가능성은 논외로 밀려났다. 이러한 특성은 여전히 특정 아티스트(그게 너바나가 됐든, 다른 뮤지션이 됐든)들에게서 엿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작품 자체와 결부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훌륭한 노래라도 록 음악에는 더 이상 특별할 게 없었다. 소위 록스타가 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록스타로 행세하는 것은 더욱 나빴다. 이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 p.81 「2장_모두가 회의주의에 빠졌다」중에서
92년 대선은 대체로 유권자들이 현재 상태와 다른 뭔가를 원했던 “변화의 선거”였다. 그들에게 그 변화의 방향이 중요했을까? 최악의 결과는 무엇이 될지 생각해 봤을까? 그동안 직무 수행 능력이 좋은 대통령도 있었고 안 좋은 대통령도 있었지만, 순수한 차이는 1991년 영화 〈슬래커〉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사람의 지문을 묘사한 대사에 비유할 수 있었다. “유사점에 비해 차이점은 미미하죠.”
--- p.117 「3장_19%의 지지율이 향한 곳」중에서
개념적으로 〈키즈〉와 〈남성 전용 회사〉는 90년대 중반 대부분 관객이 충분히 속뜻을 파악하고 감상하기에는 너무 앞서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기호, 즉 자극적인 대사는 어땠을까? 그것은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언어들을 즐겼다. 특히 공감을 사기 어려운 대사일수록 관객들은 쾌감을 얻었다. 충격을 받거나 충격을 받은 척하는 데서 재미를 찾기도 했고, 자신이 무던한 사람이라고 증명하듯 충격을 받지 않는 척하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에 담긴 개념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 한, 언어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 p.156 「4장_중심에서 바라보는 가장자리」중에서
영화를 선택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아무 목적 없이 비디오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몇 개의 비디오 박스를 꺼내 앞면을 슬쩍 훑고, 뒷면에 간략히 설명된 줄거리를 읽은 후,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는 것이었다. 어떤 체계나 논리도 없이 단순했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 제작에 미친 영향은 단순하지 않았다. 비디오 가게는 새로운 종류의 독립 영화 감독을 상당수 양산했는데, 모두 공통된 이미지가 있었다. 바로 금전적으로는 쪼들리고, 비디오 가게에서의 경험을 통해 해박하고, 비정통적이며, 허세 찌든 영화적 세계관을 구축한, 멋이라고는 없이 요란하기만 한 놈(그들은 언제나 남자였다)이라는 것이었다.
--- p.180 「5장_영화적인, 너무나 영화적인」중에서
90년대 중반 웹의 얼리 어답터들은 영토 확장에 미쳐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처럼 인터넷에 낙관적이었다. 냉소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시대였음을 고려한다면 인터넷에 대한 긍정적이고도 거의 복음주의에 가까운 믿음이 생겨났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이제 인터넷에서 재창조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 p.227 「6장_CTRL+ALT+DELETE」중에서
90년대 스테로이드 사건의 양면성은 대중이 뭔가를 명백히 그럴 리 없다고 인식해서 부정한 경우가 아니었다. 대중은 뭔가가 믿기 어려웠지만 입수 가능한 최선의 증거를 바탕으로 믿기로한 것이었다.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심히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 p.285 「7장_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중에서
사회가 “신뢰성”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거의 항상 당시 경제적 지배층에 속하는 인구 집단이 정한 기준에 따라 좌우된다. 90년대 초반에 뉴에이지 교리가 그나마 가장 진지하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뉴에이지 사상에 가장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이 그 사상을 사회에 도입할 충분한 사회적, 경제적 힘을 행사한 유일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 p.312 「8장_모든 가능성이 펼쳐지는 극장」중에서
〈타이타닉〉의 엄청난 성공은 돌이켜 보건대 90년대를 설명하는 방식이 대부분 간헐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타이타닉〉이라는 대작의 특성은 90년대에 광범위하게 퍼진 고정관념과 모순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고정 관념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언제든 무시될 수 있고, 개인의 야망에 따라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 p.363 「9장_평범해 보이는 것이 사랑받는다」중에서
콜럼바인 총기 난사 같은 끔찍한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이를 설명할 결정적 논거를 찾고 싶어 한다. 통상적으로는 진실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보니 아무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잘못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섬뜩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이 밝혀져도 믿기를 거부했다.
--- p.412 「10장_2차원적 4차원」중에서
클린턴은 사람들이 MTV 쇼를 보면서 비록 한편으로는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의심하긴 해도, 이 역시 엄연한 삶의 간접 경험 중 하나라고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실제로 대통령이 이해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와 매체를 통해 자기네 고통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원했다. 현실에서 공감의 기대치는 높지 않았고, 클린턴은 공감의 표본이었다.
--- p.446 「11장_이해한다고요, 곧 잊어버리겠지만」중에서
경기를 생중계로 보지 않은 팬들로서는 통상 알고 있는 스포츠에 대한 상식과 어긋나는 이 일을 전해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타이슨이 상상 가능한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라고 인식했지만, 상상의 범위에도 한계는 있었다. 거기에 상대의 귀를 물어뜯는 건 포함되지 않았다.
--- p.470 (12장_90년대의 끝, 20세기의 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