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특별한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우크라이나 땅은 우리가 나눠준 것이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만들었다”라는 식의 푸틴의 주장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소련에 강제병합하는 바람에 둘이 한 나라가 된 것인데 ‘역사적 과거’를 소련 시절로만 한정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 러시아 땅이었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우크라이나 땅에 사는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모두의 선택으로 독립을 해서 현재 주권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침략한 행위는 국제법상 엄연한 범죄다.
--- p.24-25, 「푸틴, 세계를 흔들다」 중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역사적 이유뿐만 아니라 군사적, 지정학적,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인 나토에 가입할 경우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된다. 러시아가 생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중략) 푸틴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병력을 대거 배치한 뒤 2021년 말 미국에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지 않을 것임을 문서 형태로 확약하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나 나토가 결정하고 약속할 사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과 러시아의 약속이나 서방의 입장이 아니라,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 의 시민들이 더 나은 삶의 기회와 안전을 위해 나토와 유럽연합 가입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토에 들어가든 유럽연합에 들어가든, 결정은 우크라이나인들이 하는 것이며 러시아가 이를 이유로 침공을 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 p.25-28, 「푸틴, 세계를 흔들다」 중에서
2002년 설립된 민간기구 ‘알 나크바 아카이브’에 따르면, 1948년 약 14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 국내 난민이 되거나 요르단, 레바논 등 인접국으로 넘어가 난민촌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난민은 5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고 보면 2023년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겪고 있는 생지옥을 ‘제2의 나크바’로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들의 대재앙은 멈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세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인권보고관은 전쟁 발발 전에 이렇게 말했다. “2023년은 나크바 75주년이 아니다. 나크바는 75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 p.74, 「나크바, 유대국가의 건국에서 시작된 비극」 중에서
막강한 정보기관들을 둔 이스라엘이 정작 하마스의 공격 때에는 왜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을까. 일부 미국 관리들은 ‘이란 지원설’에 무게를 둔다. 하마스 자체는 그런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부족한데 이란이 하마스를 도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저 멀리 이란이 아니라 자신들 옆에 족쇄를 채워 묶어둔 가자지구 하마스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정보 실패로밖에 볼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이스라엘 정부 내에서는 하마스를 계속 압박해온 만큼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능력이 없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으며 이것이 한 원인으로 지적됐다. 하마스의 기습공격 뒤 신베트 국장은 사퇴했다.
--- p.117, 「이스라엘은 어떻게 무법자가 되었다」 중에서
전쟁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사이에 시리아에서는 계속 사람들이 죽어갔을 뿐 아니라, 삶의 터전을 파괴당한 이들이 난민이 되어 집을 떠나야 했다. 시리아 안의 다른 지역으로 피한 이들, 즉 국내 난민IDPs(국내 유민)도 있었고 아예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피란길에 오른 이들도 많았다. 전쟁이 시작됐을 당시 시리아의 인구는 약 2,400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400만 명이 난민이 됐고 국외로 떠난 난민 숫자가 680만 명에 이르렀다. (중략) 그러던 중에, 2015년 9월 한 장의 사진이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튀르키예의 휴양지인 보드룸의 바닷가에서 3살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발견된 것이다. 아일란은 형편없는 보트에 몸을 싣고 가족을 따라 지중해를 건너려다가 물에 빠져 숨졌고, 주검이 해안으로 떼밀려 왔다. 모래밭에 숨져 있는 3살 아이의 모습은 시리아 내전의 참혹함을 세상에 알렸고, 세계가 이 참극에 할 말을 잃었다. 알자지라 방송은 “이 사진이 세계를 바꾸지 못한다면 무엇이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 p.143-144, 「세계를 울린 한 장의 사진」 중에서
미군은 2003년 3월부터 2011년 12월 말 철군할 때까지 8년 9개월간 이라크에 주둔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들어간 돈과 이라크 재건에 투입한 비용, 미국 내 전역병·부상병 복지비용 등을 모두 합치면 미국은 2조 달러 이상을 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은 가장 많았을 때에는 이라크에 15만 명을 파병했다. 이라크에서 숨진 미군과 다국적군 사망자 수는 4,800명이 넘는다. 이라크에서 다치고 장애를 입은 전역병들은 재정적자와 함께 미국 사회가 앞으로 수십 년간 책임져야 할 짐이다. 더불어 ‘수퍼 파워(초강대국)’로서 미국의 자존심, ‘선한 강대국’이라는 이미지도 타격을 입었다. 이 모든 것이 부시의 전쟁을 승인해주고 그에게 연임까지 안겨준 ‘못난 유권자들’에게 지워진 부담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미국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니 그 짐을 짊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은 무슨 죄일까. 미국은 전쟁의 상대국인 이라크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집계조차 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을 맡았던 미군 중부사령부의 토미 프랭크스 사령관은 “우리는 시체를 세지 않는다We don’t do body counts”라는 말로 표현했다.
--- p.211-212, 「미국의 오만, 미국을 실패로 이끌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