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헉슬리는 주교의 자손보다는 원숭이의 자손이 낫겠다고 (정말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다. 대로가 브라이언에게 그가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지를 묻긴 했지만, 스코프스 재판 자체는 진화론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에 관한 재판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유명한 전투들 안팎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우리가 단편적으로 들어온 일관된 서사를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서로 이러저러하게 연결된 수많은 이야기가 보인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한 하나의 역사란 없으며, 더욱이 유일한 단 하나의 역사란 있을 수 없다.
--- p.20, 「서론」중에서
인간이란 무엇(혹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혹은 무엇이) 그걸 말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은 한 풍경을 가로지르는 강처럼 과학과 종교의 역사들을 가로질러 흐른다.
--- p.29, 「서론」중에서
더욱 중요하고도 더욱 만연해 있었던 것은 과학 탐구에 박차를 가한, 이슬람 신앙의 실천과 관련된 욕구였다. 이슬람이 시작된 초기 역사에서부터 무슬림은 매일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했다. 그들이 향해야 하는 방향, 곧 키블라는 자연히 장소에 따라 달라졌고, 그때마다 즉각 방향을 계산하기가 어려웠다. 동서로 8000킬로미터가 넘는 지역에 펼쳐진 이슬람 제국 안에서 방향을 더 정확히 측정하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졌고, 이는 이슬람의 천문학, 기하학, 삼각법 발전의 촉매가 되었다.
--- p.78, 「2장 연약한 광채」중에서
사실 중세 과학의 연표는 칼 세이건이 생각했던 것만큼 통렬하게 비어 있지는 않았다.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세 과학사》의 두 편집자 마이클 섕크와 데이비드 린드버그는 700쪽에 이르는 이 책의 서문에서 세이건의 텅 빈 연표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중세에 대한 1980년의 지식수준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세이건이 강의하는 코넬대학에서 도서관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던 ‘통렬하게 놓쳐버린 기회’를 반영할 뿐”이라고 썼다.
--- p.121, 「4장 그리스도교 세계의 과학」중에서
갈릴레오가 카스텔리에게 보냈던 원본 편지는 분실되었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이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무엇이 원본 편지의 텍스트인지, 그리고 누가 무엇을 어떤 목적으로 조작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진실이 드러난 것은, 베르가모대학의 대학원생 살바토레 리치아노가 런던의 왕립학회 문서고에서 자료를 찾던 중 놀랍게도 수정된 부분이 모두 표시되어 있는 원본 편지를 발견하면서였다. 이 편지는 어쩌다 런던까지 흘러들었고 문서고에 소장되었으나 연대가 잘못 분류되어 있었다. 원본 편지를 보면 갈릴레오가 디니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과, 본래의 어조 때문에 비난받게 될까 두려워 어조를 누그러뜨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성경에 있는 어떤 명제들이 “어휘의 축자적 의미를 따를 경우 거짓”이라고 썼지만 ‘거짓’이라고 한 부분을 “사실과 달라 보인다”라고 고쳤다. 그리고 성경이 가장 기본적인 도그마를 ‘숨기고 있다’고 언급한 부분을 “가리고 있다”라는 좀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바꿨다. 갈릴레오는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 p.203, 「6장 갈릴레오 갈릴레이」중에서
캐번디시는 더 멀리까지 나아갔다. 왜 우리는 인간이 창조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나?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하느님을 흠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망쳐놓기 위해서 만들어졌나?
--- p.335, 「9장 영혼을 기계로」중에서
우주에 시초가 있었음을 신앙이나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점 없는 수학을 통해 처음으로 확증한 사람이 가톨릭 사제였다는 사실은 과학과 종교의 복잡한 역사 안에서도 매력적인 세부 내용이다. 그러나 그(르메르트)가 교황에게 자신의 연구 성과로부터 어떠한 신학적 결론도 끌어내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특별한 이야기 뒤에 있는, 훨씬 더 호소력 있는 반전이다. 새로운 물리학의 낯선 세계에서는 어떠한 것도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 p.572, 「15장 얽히고 불확실한」중에서
전후 시기에 소비에트 과학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의 언어와 개념을 전용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미국의 근본주의는 같은 일을 하기 위해 과학의 언어를 사용했다. 역설적이게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낯설고 긴장된 수십 년의 기간에 과학과 종교는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고자 서로 옷을 바꿔 입었다.
--- p.622, 「17장 천국을 침공하다」중에서
그러나 때로는 매개체가 역방향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도킨스가 정말로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한 적은 없다. 이기적인 것은 사람들의 유전자다. 더구나 유전자의 이기성은 때로 사람들을 협동적이고, 심지어 이타적으로 만듦으로써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이기적이고 무자비하다는 것은 그저 ‘비유’일 뿐인 듯하다. 그가 책 제목과 같은 제목을 단 장의 말미에 썼듯이, 키를 쥔 이기적 유전자들 사이에서도 “착한 녀석들이 결국 일등이 된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도킨스도 인정했듯이, 이 책의 제목은 ‘협동적 유전자’나 ‘이타적 매개체’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용한 비유를 더욱 강건하게 (어쩌면 파악하기 힘들게) 옹호했다.
--- p.630, 「18장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함」중에서
어쩌면 인공지능이 어떤 복잡성에 도달하면 확실히 인간에게 특징적인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적이고 정신적인 관심사는 등장하지 않고, 인공지능에 대해 영혼이나 권리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앞으로도 절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으로, 물질에 더해져 ‘영혼 같은’ 것으로 만드는 무언가 다르고 외부적인 것이 있을 수도 있다(비록 나는 그런 것이 없다는 데 내기를 걸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저 우리 모두가 이러한 문제에 과도하게 흥분해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인공지능 종말’은 현재나 예상 가능한 어느 시기에도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달함에 따라, 아마도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해야 하는 대화, 무엇이 (혹은 누가) 인간을 구성하는지, 누가 (혹은 무엇이) 결정권을 갖는지 하는 질문들을 고민하라고 우리에 게 요구하는 대화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과 종교의 얽힌 역사들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676, 「19장 인공 불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