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 한숨을 쉬어? 무슨 일 있어? 다시는 좋아지지 않을 특별한 불행이라도 있어? 우리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불행이야? 정말 모든 것이 끝장난 거야?”
--- p.13 「시골길 위의 아이들」중에서
그런데 우리가 오래전 그들에게서 도망쳤음에도, 그러니까 더 이상 붙잡힐 여지를 주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주저앉지도 넘어지지도 않았고, 그저 멀리서라도 여전히 확신에 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수법은 늘 똑같았다. 우리 앞에 최대한 넓게 버티고 서서 우리가 가려는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고는, 대안으로서 자기 가슴속의 집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마침내 우리 안에 모인 감정이 불끈 솟구치면 그것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면서, 얼굴부터 들이밀고 달려들었다.
--- pp.19-20 「어설픈 사기꾼의 가면을 벗기다」중에서
그렇기에 최선의 충고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무덤덤한 덩어리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후 불면 날아갈 재처럼 생각하고, 어떤 불필요한 걸음도 강요하지 말고, 타인을 동물의 눈으로 바라보고,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유령처럼 삶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손으로 짓이겨버리고, 마지막 무덤 같은 휴식을 늘리고, 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 p.23 「결심」중에서
나는 전차 안 출입구에 서 있다. 이 세상, 이 도시, 가족 안에서의 내 위치를 고려하면 지극히 불안하다. 나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요구를 할 정당한 권리가 있는지 그냥 지나가는 말로라도 말할 수 없을 듯하다. 게다가 내가 지금 이 전차 안에 서 있고, 이 올가미를 붙잡고, 이 전차가 나를 실어 나르고, 또한 사람들이 전차를 피하거나 조용히 걷고, 혹은 상점 진열창 앞에 멈춰 서는 것조차 뭔가 마땅히 변호해줄 말이 없다.
--- p.32 「승객」중에서
그들은 인상을 쓸 때가 많다. 그러고는 눈알을 희번드르르하게 굴리거나 입에 거품을 문다. 물론 그런 행동으로 무슨 말을 하려거나 겁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게 그들의 방식이기 때문일 뿐이다. 그들은 필요한 건 모두 그냥 가져간다. 폭력을 사용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물건에 손을 대기도 전에 우리는 비켜 서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내주기 때문이다.
--- p.101 「한 장의 고문서」중에서
그는 처음 몇 년 동안은 자신의 이 우연한 불행을 가차 없이 큰 소리로 저주하다가, 나중에 늙어서는 그저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 p.105 「법 앞에서」중에서
“살인의 행복! 안도감, 흐르는 타인의 피를 통한 이 격한 자극! 밤의 늙은 그림자이자, 친구이자, 술친구인 너 베제는 이제 어두운 길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네가 피로 가득 찬 거품이 되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내가 네 위에 걸터앉고, 네가 완전히 사라지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꽃의 꿈이 무르익는 것도 아니다. 너의 무거운 찌꺼기는 이제 여기 누워 있고, 어떤 발걸음도 너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이로써 네가 던지는 침묵의 질문은 무엇인가?”
--- p.134 「형제 살인」중에서
요제프 K는 이런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날이었고, K는 산책을 가려 했다. 그런데 두 걸음밖에 떼지 않았는데 벌써 공동묘지였다.
--- p.137 「꿈」중에서
거지처럼 가야 한다. 굶주림으로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문턱에 서서 손을 내밀고, 그 때문에 영주의 요리사가 커피 찌꺼기라도 던져줄 마음이 생길 만큼 애처로운 거지꼴로 가야 한다.
--- p.141 「양동이를 타는 남자」중에서
그러나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이 시간 낭비와 잘못 들어선 길을 인정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초조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동반한 이 짧고 급한 인생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라고? 그건 불가능하다. 너에게 할당된 시간은 1초라도 잃으면 이미 온 인생을 잃을 정도로 짧다. 인생은 길지 않다. 항상 네가 잃어버린 시간만큼만 길 뿐이다. 그러하기에 길을 시작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가라. 그래야 승리할 수 있다. 위험도 없다. 어쩌면 마지막에는 추락할지 모른다. 하지만 처음 몇 걸음 후에 바로 돌아서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면 시작 지점에서 바로 추락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랬을지가 아니라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 복도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 복도에 딸린 문들을 열어라. 그 문들 뒤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 다음 층이 있다. 거기 위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 그래, 그것도 위기가 아니니 또다시 계단을 올라가라. 네가 올라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계단도 멈추지 않고, 너의 발아래에서는 계단이 계속 생겨날 것이다.
--- p.200 「변호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