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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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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96쪽 | 218g | 115*180*12mm
ISBN13 979115525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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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육십이 훌쩍 넘어 여섯 살 어린 손녀를 맡아 키우게 된 할머니는 나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며 늦은 육아를 다시 시작했다. 할머니는 내게 밥을 해 주고 시장에서 내 또래 여자아이들은 절대 입지 않을 법한 옷을 사 와 입혔다. 가사를 모르는 옛 자장가를 흥얼흥얼 불러 주고 엄마를 찾으며 우는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 역시 할머니 귀에 귀고리를 걸고, 할머니가 건넨 바늘에 실을 꿰었다. 밀가루 봉지에 작은 글씨로 적힌 유통기한을 읽고, 시간에 맞춰 드셔야 할 약을 챙겨 드렸다. 할머니와 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보살폈지만, 우리의 돌봄은 꼼꼼하지도 완벽하지도 못했다. 긴 손톱이나 뒤꿈치가 해진 양말, 때가 채 빠지지 않은 옷소매 같은 사소한 것들에서 엄마의 부재는 쉽게 티가 났다.
--- 「손톱 깎아 주는 마음」중에서

엄마와 복수. 나는 고모의 탁한 목소리를 들으며 앞에 놓인 전화번호부 빈 곳에 ‘엄마’와 ‘복수’라는 단어를 썼다. 복수라는 단어는 불을 품고 있는 글자 같았다. 마음에 불을 확 지르는 단어. 둘째 고모 말대로라면 나는 나를 놀리는 친구들을 흠씬 두들겨 패고, 엄마를 향한 복수심과 동생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오직 성공을 향해 내달리는 야망 있는 어린이가 되어야 할 테지만, 내게 다가온 복수라는 단어는 잠잠했다. 몇 번이고 복수라는 단어를 써 봐도 마음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 「아름다운 복수」중에서

아이는 부모의 사랑으로만 크지 않는다. 내게 할머니와 고모, 고모부는 부모를 대신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였다. 그들은 ‘딸처럼’이라는 말을 달고 부모의 사랑을 흉내 내지 않았다. 그저 손녀에게, 조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을 주었다. 나는 그들이 준 사랑을 고스란히 받았다.
--- 「사랑의 출처」중에서

세상은 ‘낳은 정’ ‘기른 정’이라는 말로 어느 쪽에 모성애가 더 있는지 저울질하려 들었다. 아이를 해치치 말라고 울부짖는 여자가 아이의 친엄마라고 판결하는 솔로몬 이야기는 ‘낳은 정’이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낳은 정’이란 말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할퀴는 말이기도 했다. 세상의 새엄마들에게는 냉정하고 표독스러운 이미지를 들씌웠고, 아이를 낳은 친엄마에겐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를 꼭 제 손으로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렇지 못할 경우에 죄책감을 더 크게 안겨 주었다. 뿐만 아니라 친엄마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에겐 당연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상실감을 주었다.
--- 「새엄마의 시간에서 친엄마의 시간으로」중에서

내가 앉아 있던 교실 안에도 나처럼 거짓 편지를 써야 했던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연필 끝을 입술에 톡톡 부딪히며 다음 쓸 말을 곱씹던 아이, 맞춤법을 잘 몰라 연필보다 지우개를 더 많이 쥐었던 아이, 팔꿈치로 짝꿍을 툭툭 치며 장난을 걸던 아이.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중 누군가는 나처럼 거짓말을 지어내느라 분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을 애써 감춰야 했던 아이가 있는 교실을 떠올리면 마음에 또 한 번 바람이 분다.
--- 「거짓말로 시작하는 편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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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에게 필요했던 건 나의 ‘없음’을 일깨우는 연민이 아니라, 내 삶 곳곳에 사랑이 ‘있음’을 알려 주는 ‘속 깊은 무관심’이었다. 길게 자란 손톱에서 엄마의 부재를 읽는 대신 묵묵히 손톱을 깎아 주는 마음, 아빠가 죽고 엄마와 헤어지고 동생마저 사라지는 그런 삶이 다 있느냐며 깜짝 놀라는 대신 ‘그런 인생도 있구나’ 가만히 끄덕여 주는 마음. 책을 읽으며, 호기심 어린 관심보다 모르는 척해 주는 무관심이 어쩌면 사랑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라는 동안 내가 듣고 싶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이 되어 지금 나에게 도착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내 안에 그 시절의 아이가 남아 있으니까. 어린 나와 어른이 된 내가 힘을 합쳐 이 책을 세상 쪽으로 밀어 보낸다. 그런데, 문득 궁금하다. “어떤 부재와 부족이 삶을 통째로 남루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라는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 김달님 (《나의 두 사람》 《우리는 조금씩 자란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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