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분을 예로 들어보자. 사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기술하고 결정하는 이 수학 이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발전 중 하나이다. 미적분은 공학에 필수적이며(미적분이 없다면 다리나 로켓을 정확하게 만들 수 없다), 거의 모든 과학 분야에 쓰이면서 세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그렇다면 미적분을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 17세기에 영국 수학자 아이작 뉴턴과 독일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거의 동시에 각자 독자적으로 발명했다고 이야기한다. (…) 미적분의 배경을 이루는 개념들을 훨씬 앞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14세기에 인도 케랄라에는 많은 수학자들이 활약한 천문학 및 수학 학파가 있었다. 그 창시자인 상가마그라마의 마다바는 아주 뛰어난 수학자였는데, 그의 업적 중에는 미적분 이론을 설명한 것도 있었다. 마다바는 미적분을 가능케 한 핵심 개념들을 탐구했고, 케랄라 학파의 수학자들이 이를 더 갈고닦으면서 발전시켰다.
--- p.10
‘달력의 집’이라 불린 마야 필경사들의 작업실 유적은 천문학자들이 데이터를 어떻게 기록했는지 알려준다. 기원전 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작업실의 벽과 천장은 여러 인물과 숫자와 상형 문자를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벽은 아마도 일종의 칠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벽에는 달력과 천문학 계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상형 문자가 여러 가지 색으로 적혀 있다. 두 계산표의 흔적은 달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어쩌면 화성과 금성의 움직임을 나타냈을 수도 있다. (…) 이들은 일식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심지어 8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금성의 기묘한 움직임도 예측해냈다. (…) 마야인은 달과 별들의 움직임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측정했다. 예를 들면, 음력으로 149개월이 4400일이라고 계산했다. 이것은 음력으로 한 달이 29.5302일에 해당한다는 뜻인데, 오늘날 우리가 측정한 값은 29.5306일이다. 또한 1년의 길이가 365.242일이라고 계산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아낸 값은 365.242198일이다.
--- p.41
17세기 독일의 수학자이자 박식가였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주역』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을 읽다가 라이프니츠는 『주역』의 괘가 자신이 연구하던 수 체계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란 사실을 알고서 크게 놀랐다. 그래서 그 책에 관심을 갖게 해준 예수회 선교사 조아킴 부베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 체계가 내가 새로 고안한 산술 방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랍소.”
--- p.59
[3세기의 수학자] 유휘의 『구장산술주』는 수학의 향연이라 일컬을 만한 저술이었다. 유휘의 책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 흔히 π라는 기호로 나타내는 원주율의 근삿값이었다. 유휘가 π의 값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정확한 값을 구했다. 바빌로니아인은 π의 값이 약 3이라고 알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그 값의 범위를 3.140과 3.142 사이로 좁혔다. 유휘는 아르키메데스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해 π의 값을 소수 다섯째 자리까지 정확한 3.14159로 구했다. 지금은 슈퍼컴퓨터를 사용해 π의 값을 소수 50조째 자리까지 계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우주로 보내는 로켓을 정확하게 제어하는 데에는 소수 열넷째 자리까지만 알아도 충분하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정확한 값을 아는 것은 실용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 유휘가 π의 값을 구하는 데 사용한 방법은 다소 교묘한 것이었는데, 바로 다각형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 5세기에 중국 수학자 조충지는 유휘와 같은 방법으로 24576각형을 사용해 π의 값을 소수 일곱째 자리까지 더 정밀하게 구했다. 이것이 한동안 세계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15세기 초에 아랍 수학자 잠시드 알 카시가 π의 값을 소수 열여섯째 자리까지 정확하게 구하면서 갱신되었다. 지금도 실제로 필요한 것 이상의 정밀한 값을 이미 600여 년 전의 수학자가 계산한 것이다.
--- p.62
유휘가 증명한 것 중 하나는 오늘날 ‘피타고라스의 정리’라 부르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구고 정리(勾股定理)’라고 불렀다. 그 당시 수학자들에게 삼각형은 실용적으로 특별히 중요한 도형이었다. 예컨대 본토에서 바라본 섬의 높이나 멀리 떨어진 성곽 도시의 크기, 멀리서 바라본 협곡의 깊이나 하구의 폭 등을 계산하는 데 유용했다. 『구장산술』과 같은 책에서는 이런 것을 실례로 든 문제를 많이 다루었다. 『구장산술』에 실린 구고 정리는 이 정리를 다룬 기록으로는 가장 앞선 것이어서, 이 정리는 ‘피타고라스의 정리’ 대신에 ‘구고 정리’라고 불러야 마땅해 보인다. 어쨌건 이 정리는 바빌로니아, 이집트, 인도, 그리스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재발견되었다.
--- p.65
1883년 4월, 인도 뭄바이대학교 평의회는 특이한 회의를 열었다.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0여 명의 대학교수와 시 공무원, 판사가 모였는데, 향후 인도의 공공 생활을 좌우할 기본 원칙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문제의 중심에는 단순해 보이는 수학적 질문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큰 논란을 야기해 시위와 폭동까지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지금은 몇 시인가?”라는 질문이었다.
--- p.105
야질리카야의 높은 암벽은 웅장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기원전 16세기 후반 이전의 어느 시기에 청동기 시대 히타이트 제국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암벽에 신들과 상징을 묘사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 이곳은 야외 피정 장소로 쓰였을 것이다. 이 구조물은 3000년 이상 이곳에 서 있었지만, 그 목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 야질리카야 석회암 채석장의 한 통로에는 신과 인간, 동물, 신화 속 인물이 90개 이상이나 암벽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2019년, 한 연구팀은 이것들이 음력의 한 달에 해당하는 날들을 기록하는 데 쓰였을 거라고 주장하면서, 각각의 날에 이 인물들 앞에 돌 표지를 굴리면서 이동시켰을 거라고 했다. 첫날은 초승달이 뜬 날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 성스러운 장소는 걸어서 돌아다니면서 보는 3차원 달력인 셈이다.
--- p.111
하지만 물시계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다가 1206년에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박식가이자 발명가인 이스마일 알 자자리가 코끼리 시계를 만들었다. 코끼리 시계는 아주 경이로운 발명품으로, 오늘날 알 자자리가 가끔 로봇공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기계 장치는 거대한 모형 코끼리 꼭대기에 있는 덮개 안에 들어 있었고, 꼭대기에서 노래를 부르는 새와 위아래로 움직이며 공을 전달하는 뱀, 코끼리 등 위에 앉아 반시간마다 북을 치는 사람 모양의 자동인형까지 갖춰져 있었다. 코끼리 시계 내부에는 물통이 있었고, 여기에 그릇이 둥둥 떠 있었다. 반시간 동안 물이 천천히 그릇으로 떨어지면 그릇이 점점 무거워짐에 따라 물속으로 더 깊이 가라앉았고, 그러다가 코끼리 꼭대기에 달린 줄을 끌어당기면서 공이 떨어지게 했다. 공은 뱀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그러면 뱀은 몸이 앞으로 기울면서 연결된 줄을 잡아당겨 가라앉은 그릇을 물통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러면 새가 울고 사람이 심벌즈를 치면서 반시간이 지났음을 알렸고,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었다. 전체 요소들이 수학적 조화를 이루면서 시계가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도록 보장했다.
--- p.117
0은 브라마굽타 이전에도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알려진 것 중 가장 일찍 사용된 사례는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마야 문명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조가비처럼 생긴 기호를 자리 표시자(0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 중 하나)로 사용했다. 0을 자리 표시자로 사용하는 개념은 수를 생각하는 방식에 놀랍도록 유용한 전환을 가져온 발전으로,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 자리 표시자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로마 숫자와 비교해보자. 로마 숫자로 201은 CCI이라고 쓰는데, C는 100을, I는 1을 나타낸다. 로마 숫자에는 0을 나타내는 기호가 없으므로, 이 숫자에는 10의 자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덧셈처럼 단순한 계산을 하려고만 해도 문제가 생긴다. 99에 201을 더하는 계산은 쉽다. 먼저 1의 자리를 더하고, 다음에는 10의 자리를 더하고, 마지막으로 100의 자리를 더해서 합하면 된다. 하지만 XCIX에 CCI을 더하려고 해보라. 로마인이 이런 숫자로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의문이 든다.
--- p.143
세상에 10진법을 도입한 것만 해도 한 사람이 이룬 업적으로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알 콰리즈미의 많은 업적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쓴 『복원과 대비의 계산』은 결국 서아시아와 유럽 전역에서 지배적인 수학 교과서가 되었다. 모든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두 가지가 이 책에 나오는데, 바로 ‘대수학’과 ‘알고리듬’이다. 대수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algebra’는 이 책의 제목에 쓰인 ‘알 자브르’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대수학은 숫자 대신에 문자를 사용해 수의 관계와 성질을 연구하고 방정식에서 미지수의 값을 구하는 수학 분야를 가리킨다. 하지만 원래 알 자브르는 방정식을 풀기 위해 방정식을 재배열하는 특정 기법인 ‘복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책 전체에 걸쳐 알 콰리즈미는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실용적인 문제(상속이나 토지 분할, 소송, 거래, 운하 건설 등과 관련된 문제)를 푸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발전시킨 한 가지 중요한 수학 개념은 1차방정식과 2차방정식을 푸는 방법이다.
--- p.168
이 이야기는 또한 17세기 유럽에서 수학이 발전한 주요 방법 중 하나를 보여주는데, 바로 편지 왕래였다. 한 사람이 어떤 문제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자신의 생각을 편지로 써 다른 사람에게 보낸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다른 관점이나 접근법으로 그 문제를 다룬다. 편지가 오갈 때마다 조금씩 진전이 일어났고, 그러다가 마침내 해결책에 이르렀다. 편지는 비밀에 부쳐지지 않았다. 대신에 편지에 적힌 학문적 논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께 읽히고 공유되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과 아메리카의 지식인 공동체는 풍부한 학문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번성했다. 이 운동은 훗날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 불리게 된다.
--- p.194
[데카르트와 엘리자베트] 두 사람은 수학에 관한 대화도 나누었다. 데카르트는 ‘아폴로니오스의 문제’라는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라고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내심 얀 스탐피운에게서 배운 수학 실력의 한계가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데카르트는 그런 문제를 엘리자베트에게 보내는 것을 ‘다소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천사조차도 … 약간의 기적이 없이는 그 문제를 풀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이 거드름은 완전한 판단 착오로 드러났다. 엘리자베트는 그 문제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두 가지 방법으로 풀었다. (…) 분명히 엘리자베트는 재능 있는 수학자였다. 연구를 이어나가던 데카르트는 1644년에 출간한 『철학의 원리』를 엘리자베트에게 헌정하면서 “내가 이전에 발표한 모든 연구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는 당신이 유일합니다”라고 썼다.
--- p.203
많은 사람이 미적분을 두려워한다.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기묘한 수식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수학을 포기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실상을 심하게 곡해한 것이기도 하다. 미적분의 세부적인 계산은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는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아주 우아하고 아름답다. 미적분이 주어진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을 보면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미적분은 큰 문제를 작은 문제들로 쪼개서 해결하는 게 최선이라는 개념을 실현한 결과에 불과하다. (…) 우리의 케이크는 반지름이 r인 완벽한 원기둥이다. 맛에 상관없이 여기서 떠오르는 명백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케이크의 크기는 얼마일까? 즉, 케이크의 부피는 얼마일까? 큰 문제를 작은 문제들로 쪼개는 것이 최선이라는 개념에 따라 케이크를 쪼개보기로 하자. 그런 다음, 그 조각들을 다른 방식으로 합쳐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평행사변형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다만 윗변과 아랫변이 구불구불하다. (…) 미적분의 비결은 케이크를 계속 잘라 조각의 크기를 점점 더 작게 만드는 것이다. 조각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윗변과 아랫변의 곡선이 점점 반반해지는데, 따라서 무한히 많은 조각으로 자른다면 실제로 완전한 평행사변형이 될 것이다.
--- p.220
한번은 라이프니츠가 무한급수에 관해 자신이 얻은 결과(케랄라 학파가 알았던 것과 비슷한 결과)를 뉴턴에게 보냈다. 라이프니츠는 깊은 인상을 주길 기대했지만, 돌아온 답장은 늙은 영국인의 비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종류의 급수에 이르는 방법을 나는 이미 세 가지나 알고 있소. 그러니 새로운 방법을 전달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오.” 다시 말해서,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보낸 수학을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결론에 이르는 방법을 세 가지나 알고 있다고 답한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뒷북을 쳤다는 이야기였다. 뉴턴의 비웃음은 계속되었다. 라이프니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수학 내용으로 편지를 마무리 짓는 대신에 이렇게 썼다. “이 연산의 기초는 사실 충분히 명백합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설명을 자세히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숨기는 쪽을 택하겠소. ‘6accdae13eff7i3l9n4o4qrr4s8t12vx.’” 이것은 조롱이었다. 이 기묘한 숫자와 문자열은 미적분의 기본 정리를 라틴어로 표현한 암호 메시지였다.
--- p.235
1737년에 출판된 『숙녀를 위한 뉴턴주의』는 굉장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서 『프린키피아』에 대한 큰 관심을 끌어냈다. 저자는 18세기의 박학다식한 이탈리아 지식인 프란체스코 알가로티 백작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편견에 사로잡혀, 여성은 ‘상상력이 너무 지나쳐’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여성이 남성보다 상상력이 조금 더 많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불리한 점이 될 리는 만무하다. 원래 수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학문이 아닌가? 원(수학적으로 완벽한 원)처럼 단순한 것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책에서 알가로티는 기사와 후작 부인 사이에 오가는 가상의 대화를 통해 뉴턴의 개념을 더 친숙하게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기사는 자신을, 후작 부인은 뒤 샤틀레를 모델로 삼았다. (…) 거기다가 알가로티는 뉴턴주의를 약간 낭만적으로 만들었다. 한 장면에서 “장소들의 거리의 제곱이라는 이 비율은 … 심지어 사랑에서도 나타난다는 … 생각이 자꾸 떠올라요”라고 후작 부인은 말한다. “그래서 8일 동안 떨어져 있으면, 사랑은 첫째 날보다 64배나 옅어지지요.”
--- p.266
이와 같은 연립방정식을 풀 때 중국 수학자들은 음수는 검은색 산가지로, 양수는 빨간색 산가지로 나타냈다. 그리고 방정식을 효율적으로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산가지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계산을 했다. 중국의 예수회 수학자들이 강력하게 지지한 유럽식으로 연립방정식을 풀려면 더 힘들 때가 많았다. 그들은 문제를 특정 규칙을 적용할 수 있는, 알 콰리즈미가 처음 기술한 것과 비슷한 표준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 항들을 이리저리 옮겼다. (…) 차수가 높은 방정식을 풀려고 할 때면 유럽식 방법은 훨씬 더 번거로웠다. 그들은 라딕스나 젠스, 쿠부스처럼 미지수의 다양한 거듭제곱을 나타내는 이름을 따로 사용했는데, 이 같은 관행은 오히려 이런 다항 방정식의 표현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에 중국 수학자들은 산가지를 사용해 이런 형태의 방정식을 훨씬 우아하게 다룰 수 있었다.
--- p.287
1888년, 파리. 프랑스과학아카데미가 주최한 명성 높은 보르댕상 경연에 응모한 논문들이 제출되었다. 심사 위원들이 응모자의 명성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모든 논문에는 응모자 이름 대신에 특정 구절만 표시돼 있었다. 그중에서 군계일학처럼 빛나는 한 논문이 심사 위원들의 눈길을 끌었다. 유명한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마저 머리를 긁적이게 만들면서 100년 이상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수학 문제에 답을 제시한 논문이었다. 저자 이름을 표시하는 칸에는 “아는 것만 말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라.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는 구절만 있었다. 평생 동안 차별과 좌절과 개인적 불행을 겪다가 이제야 뜻을 이룬 사람의 필명이었다. 어쩌면 그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것은 이 좌우명처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끈질긴 결의였을지도 모른다. 프랑스과학아카데미의 회장인 천문학자 쥘 장센은 우승자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가 수여하려는 왕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우며 얻기 어려운 왕관이 이제 한 여성의 이마 위에 씌워질 것입니다.” 그해의 보르댕상 우승자는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 교수인 소피야 코발렙스카야였다.
--- p.297
코발렙스카야는 미타그-레플레르와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1881년에 코발렙스카야는 아름다우면서도 풀기 어려운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면서 그 문제를 ‘수학의 인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썼다. 그것은 발레리나라면 직관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이다. 한 발로 서서 빙빙 도는 피루엣 동작을 할 때, 발레리나는 팔이나 다른 쪽 다리의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회전 속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 빙빙 돌면서 자세를 조금만 바꾸면 회전 속도를 빠르게 할 수도 있고 느리게 할 수도 있다. 그들은 관련 변수들(형태와 가속도와 속도)을 너무나도 쉽게 이해한다. 한 변수에 변화를 주면 다른 변수가 변한다. 변수들 사이의 관계에 숙달되면, 발레리나는 회전 속도를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수학자는 그런 행운과 거리가 멀다. 팽이조차도 완전히 둥글지 않으면 수학적으로 제대로 기술할 수 없었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무작위적이고 어려워서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코발렙스카야는 팽이의 수학을 제대로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편지에서 “이 연구는 너무나도 흥미롭고 매력적이어서 한동안 나머지 모든 것을 잊고, 있는 열정을 다 끌어모아 이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라고 썼다.
--- p.315
저자인 우리 자신도 기존의 개념과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되도록 사실에 기반을 두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이것 역시 나름의 문제가 있다. 수학의 역사에서 어떤 것을 포함하고 어떤 것을 제외할지 판단하는 것은 어느 정도 윤리적 결정이다. 누구의 공을 인정해야 할까? 누구를 생략하고 누락시켜야 할까? 어떤 역사책도 결코 완전할 수가 없다. 대신에 우리는 수학의 내러티브 아크(이야기나 작품이 흘러가는 전체적인 구조)를 더 공정하고 대표적인 역사 쪽으로 틀어놓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어떤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수학이 발전해온(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가는) 방식을 제대로 반영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여전히 생명력이 넘치고,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국제적인 팀 스포츠가 되었다. 예를 들어 지난 30년 사이 수학 분야에서 일어난 가장 큰 개가를 살펴보자. 그것은 앤드루 와일스가 1995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사건이다. (…) 피에르 드 페르마는 약 400년 전에 책의 여백에 자신이 이것을 증명했다고 적었지만, 그 후로 이를 증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피 제르맹을 비롯해 많은 수학자가 이 정리를 증명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이를 증명하는 데에는 현대 수학의 모든 능력과 온갖 인물이 필요했다.
--- p.436
에르되시 팔은 헝가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치 독일이 맹위를 떨치면서 유대인을 박해하자 고국을 떠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면서 다양한 수학자와 협력 연구를 했다. 그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동료의 집을 찾아와 “내 뇌는 열려 있소”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고는 꽤 오래 머물면서 협력 연구를 통해 기어이 논문 몇 편을 완성한 뒤 다음번 동료를 찾아갔는데, 머물던 집의 주인에게 다음에는 누구를 찾아가는 게 좋을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평생 동안 그는 500명 이상의 수학자와 협력 연구를 하면서 약 150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어떤 수학자가 발표한 것보다 많은 기록이다.
에르되시가 이렇게 많은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일부 수학자들은 협력 연구 관계에서 그와 얼마나 ‘가까웠는지’ 에르되시 수를 통해 추적한다. 에르되시 수 1은 에르되시와 함께 논문을 발표한 경우이고, 에르되시 수 2는 에르되시와 함께 논문을 발표한 사람과 함께 논문을 발표한 경우이며,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에르되시 수가 0인 사람은 오직 한 명뿐으로, 바로 에르되시 자신이다. 에르되시 수가 2인 사람은 1만 1000명이 넘는데, 이것은 협력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뻗어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인 티머시 레벨의 에르되시 수는 4이고, 케이트 기타가와의 에르되시 수는 5이다.)
--- p.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