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시.
나는 이제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시시각각 걸음을 서두른다.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갑니다. 한 차례 여행이 끝나고,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다시 만나는 사람이 있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 스쳐 지나가는 사람. 나는 인사를 나누며 점점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입니다.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 어린 시절의 흔적만이, 항상 당신 곁에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손을 흔들어주어서, 고마워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흔들어준 손, 고마워요.
--- p.194
하지만 저 행복한 여름, 그 부엌에서. 나는 불에 데어도 칼에 베여도 두렵지 않았다. 철야도 힘들지 않았다. 하루하루, 내일이 오면 새로운 도전이 가능하다는 즐거움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순서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만든 당근 케이크에는 내 혼의 단편이 들어 있었고, 수퍼마켓에서 새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발견하면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그렇게 하여 즐거움이 무언지를 알았고, 이제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기분이 안 든다. 그래서, 이런 인생이 되었다. 어둠 속, 깎아지른 듯한 벼랑 끝을 아슬아슬 걸어 국도로 들어서서 후, 하고 안도한다. 이젠 질렸다고 생각하면서 올려다보는 달빛의, 마음으로 스미는 아름다움을 나는 알고 있다.
--- p.80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 게 좋아. 아이든가, 화분이든가. 그러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거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중략) 하지만 인생이란 정말 한번은 절망해 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중략) 싫은 일은 썩어날 정도로 많고, 길은 눈길을 돌리고 싶을 만큼 험하다... 고 생각되는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랑조차 모든 것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황혼녘의 햇살을 받으며 가느다란 손으로 초목에 물을 주고 있다.
--- p.58-59
'자 그럼 선물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유이치가 말했다. 이제 혼자서 그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자마자 식물들에게 물을 줄 것이다.
'역시 장어 파이가 좋을까.'
내가 웃으며 말했다.가로등빛에 유이치의 옆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장어 파이라구? 그건 도쿄 역에 잇는 매점에서도 파는데.'
'그럼...녹차?'
'으음 와사비 절임은 어떨까.'
'뭣? 난 별론데. 맛있어. 그거?'
'나도 청어알 절인 거 말고는 별로야.'
'그럼 그걸로 사지 뭐.'
나는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순간, 따뜻한 차 안으로 찬 바람이 휘익휘익 불어 들어온다.
'앗, 추워!'
내가 소리를 질렀다.
--- p.105
아까의 진공이 불현듯 말이 되어 머리를 스친다.
'유이치가 있으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나는 상당히 당황하였다. 너무도 강렬하게 빛나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마음이 벅차오른다.
--- p.83
사람이란 상황이나 외부의 힘에 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내면 때문에 지는 것이다. 이 무력감, 지금 그야말로 바로 눈 앞에서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이 끝나가고 있는데, 조금도 초초하거나 슬퍼 할 수 없다. 한 없이 어두울 뿐이다. 아무쪼록, 좀더 밝은 빛이나 꽃이 있는 곳에서 천천히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다. 드디어 돈까스 덮밥이 나왔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나무 젓가락을 갈랐다. 배가 고프면……먹어야지,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모양새도 먹음직 스럽게 생겼지만, 먹어보니 정말 맛있다. 굉장한 맛이다.(중략) 그리하여 가게를 나온 나는, 깊은 밤 부른 배에, 아직 따끈한 돈까스 덮밥 팩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한길에 우뚝 서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내가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어쩌나……하고 주춤 거리고 있는데, 택시를 기다리는 줄 알고 바로 눈 앞으로 미끄러져 온 빈 택시를 본 순간, 결심 하였다.
--- p.124-125
사람들은 모두, 여러 가지 길이 있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하는 순간을 꿈꾼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알았다. 말로서 분명하게 알았다. 길은 항상 정해져 있다 그러나 결코 운명론적인 의미는 아니다. 나날의 호흡이, 눈길이,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자연히 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정신을 차리니 마치 당연한 일이듯 낯선 땅 낯선 여관의 지붕 물구덩이 속에서 한겨울에, 돈까스 덮밥과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p.130-131
봄빛속에서,인파에 섞여 그는 물끄러미, 물끄러미 윈도를 보고 있었다 테니스 기구 옆에 있으면 그는 아릿한 기분이 되리라. 내가 히라기와 함께 있을때만, 히토시를 닮은 만큼 차분해지는 것처럼 그건 슬픈일이다.
--- p.175
바닥에는 야채 부스러기들이 널려 있고, 슬리퍼 바닥이 새카맣게 더러워진다 하더라도 이상하게 부엌은 넓을수록 좋다. 겨울 한철쯤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만큼 식료품이 가득 들어찬 거대한 냉장고가 떡 버티고 있고, 그 은빛 문에 내가 기대선다. 기름이 여기저기 튄 가스 레인지나 녹이 슨 식칼에서 문득 고개를 들면 창 밖으로는 쓸쓸히 별이 빛난다.
나와 부엌만이 남는다.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느낌이다. 정말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을 때, 나는 혼자서 황홀한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 죽을 때가 오면 부엌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홀로 추운 곳에서 죽든 누군가가 있는 따뜻한 곳에서 죽든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싶다. 부엌에서라면 괜찮을 것이다
--- p.7~8
며칠 전, 할머니가 죽었다. 깜짝 놀랐다. 확실하게 존재하였던 가족이란 것이, 세월을 두고 한 명 두 명 줄어들어, 지금은 나 혼자라 생각하니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태어나고 자란 방에 나 혼자 있다니, 놀랍다. 무슨 SF같다. 우주의 어둠이다.
--- p.9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양이든, 부엌이기만 하면,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장소이기만 하면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기능을 잘 살려 오랜 세월 손때가 묻도록 사용한 부엌이라면 더욱 좋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깨끗한 행주가 몇 장 걸려 있고 하얀 타월이 반짝반짝하게 빛난다.
구역질이 날 만큼 너저분한 부엌도 끔찍이 좋아한다. 바닥에 채소 부스러기가 널려 있고, 실내와 밑창이 새카매질 만큼 더러운 그곳은, 유난스럽게 넓어야 좋다. 한 겨울쯤 무난히 넘길 수 있을 만큼 식료품이 가득 채워진 거대한 냉장고가 우뚝 서 있고, 나는 그 은색 문에 기댄다. 튀긴 기름으로 눅진한 가스 레인지며 녹슨 부엌칼에서 문득 눈을 돌리면, 창 밖에서는 별이 쓸쓸하게 빛난다.
--- pp. 7-8
난 내 인생을 사랑하고 있다. 남자였던 과거도, 네 엄마랑 결혼했던 일도, 그녀가 죽은 후에, 여자로 살아온 세월도, 너를 키워 성장시킨 것도, 함께 즐겁게 산 것 …… 아아, 미카케를 내 집에 들인 것! 그땐 정말 즐거웠지. 어째 미카케를 만나고 싶구나. 그애도 소중한 내 자식이다. 아아, 무지무지 감상적인 기분이다. 미카케한테 안부 전해다오.
--- p. 72
나와 부엌이 남는다.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 그나마 나은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기진맥진 지쳤을 때, 나는 문득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 죽을 때가 오면, 부엌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고. 홀로 있어 추운 곳이든, 누군가 있어 따스한 곳이든, 나는 떨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고 싶다. 부엌이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낮과 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였다. 언젠가 유이치가 말했다.
'왜 너랑 밥을 먹으면, 이렇게 맛있는 거지.'
나는 웃으며,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충족되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말했다.
'아니야, 달라. 그게 아니야.'
웃음을 터뜨리며 유이치가 말했다.
'아마 가족이기 때문일 거야.'
--- p. 8 ; 135
나는 지금, 그를 알게 되었다. 한 달 가까이나 같은 곳에 살았는데, 지금 처음으로 그를 알았다. 혹 언젠가 그를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하게 되면, 항상 전력으로 질주를 하는 나지만, 구름진 하늘틈 사이로 보이는 별들처럼, 지금 같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조금씩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손을 움직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 p.42-43
나는 안다. 즐거웠던 사간의 빛나는 결정이, 기억속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지금 우리를 떠밀었다. 싱그럽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향기로웠던 그날의 공기가 내 마음에 되살아나 숨쉰다. 또 하나, 가족에 관한 추억.--- p. 134
정말 좋은 추억은 언제든 살아빛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애처롭게 숨쉰다.--- p. 134
--- p.
나는 담요를 둘둘 말고, 오늘밤도 부엌 옆에서 자는 게 우스워 웃었다. 그러나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그런 잠자리만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외로움이 커지니까 안 된다. 하지만 부엌이 있고, 식물이 있고, 같은 지붕 아래 사람이 있고, 조용하고...... 최고다. 여긴 최고다. 나는 안심하고 잠들었다.
--- p.24-25, --- '키친' 중에서
'나, 이즈에서 택시를 타고 왔어. 있지 유이치. 난 유이치를 잃고 싶지 않아. 우린 내내, 아주 외롭기는 하지만 푸근하고 편한 곳에 있었어. 죽음은 너무 버거우니까, 젊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럴 수 밖에 없었지. ...... 앞으로 나와 함께 있으면 괴로운 일이며, 성가신 일, 지저분한 일도 보게 될지 모르지만, 만약 유이치만 좋다면, 둘이서 더 힘들고 더 밝은 곳으로 가자. 건강해진 다음이라도 좋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이대로 사라지지 말고.'
--- p.136
꿈의 키친.
나는 몇 군데나 그것을 지니리라. 마음속으로, 혹은 실제로. 혹은 여행지에서, 내가 사는 모든 장소에서, 분명 여러 군데 지니리라.
--- p.60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물소리만 콸콸 울리는 가운데, 우라라와 나란히 건너편 강기슭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렸다. 조금씩, 날이 밝아온다. 파란 하늘이 물색으로 변하고, 재재거리는 새 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나는, 귓속으로 희미하게 어떤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흠칫 놀라 옆을 보니 우라라는 없었다. 강과, 나와, 하늘과 - 그리고 바람과 강물 소리에 섞여, 귀에 익는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 p.187
그로부터 어언 4년 동안, 방울은 모든 낮과 밤, 모든 사건을 함께 하였다. 첫키스, 말다툼, 개이고 비오고 눈 온 날들, 함께 지낸 첫 밤, 모든 웃음과 눈물, 좋아했던 음악과 텔레비젼 프로그램 - 둘이서 있었던 모든 시간을 공유하면서, 히토시가 지갑 대신 그 전철표지갑을 내미는 손과 함께, 늘 딸랑딸랑 조그맣고 투명한 소리로 울렸다. 귓전을 맴도는 사랑스런, 사랑스런 소리다.
--- p.144